카테고리 없음

[스크랩] 몽골의 신앙

현곡 이종수 2012. 5. 28. 07:55

 

몽골 신앙과 종교 - 자연 신앙 
 

조상신상

*  자연물 신앙  *

인간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신앙적 뿌리 위에서 삶을 영위해 왔다. 이러한 신앙적 삶의 태도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생각한다’는 특수성과 연관이 있으며, 다른 한편 인간 힘이 광대한 자연의 위협과 신비를 감당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기도 한다.

현재 몽골의 국교는 불교이지만, 전반적인 생활 깊숙이 자연신앙이 자리 잡고 있다. 자연신앙의 대상은 자연물 전체가 될 수 있으며, 특히 돌이나 물, 나무, 동물, 새, 대지, 산, 별 등 자연의 대상물 가운데 어떤 특수한 형태나 성질을 가진 것들이 포함된다.
 

* 자딩촐로와 바위신앙  *

자연 신앙에도 여러 가지 변천의 과정이 있어 한 가지로 요약해 말할 수는 없으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페티시즘(feticism) 즉 물신(物神) 신앙이다. 이것은 자연물 그 자체가 초자연적인 힘 내지 마법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신앙의 원초적인 형태인데, 그 대표적인 것으로 자딩촐로가 있다. 고대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주변에 가장 가까이 있으며 생활의 강력한 도구가 되는 돌을 물신화하여 신앙하는 풍습이 보편적이었다.

몽골인들은 예로부터 화살촉 모양이나 네모형의 차돌 형태의 ‘자딩촐로’로 비를 오게 하거나 천기를 변화시키는 데 사용해 왔다. 몽골 서사시의 영웅들은 이 돌을 강력한 적의 목숨을 끊는 무기로 사용했다. 몽골의 선조 중 유연 사람들은 전쟁을 하거나 적의 미행을 따돌리기 위해 자딩촐로를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몽골인들이 이러한 자딩촐로를 적어도 1,500년 전부터 사용했다고 본다. [몽골 비사] 143절에 나이만의 보이록 항, 오이라드의 호토가가 자드를 사용해 비바람을 일으키지만 오히려 그들 쪽으로 비바람이 휘몰아치자 “하늘이 우리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며 도망쳤던 사건이 나온다. 이렇게 13세기에도 전쟁에 자딩촐로를 이용했으며, 어거대칸 때에 중국 병사에 저항하면서 자드를 잡았던 기록이 있다. 몽골학자 게.엔.포타닌의 기록에 의하면 19세기 말에 서부 몽골인들이 자드를 사용했던 것에 관해 기록했다.

자딩촐로의 기원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하늘에서 내려왔다, 산에서 얻었다, 동물에서 나왔다는 등의 견해가 있다. 몽골인들은 고대로부터 돌을 하늘의 것, 하늘에서 기원한 것이라고 신앙시했다. 자드를 서부 몽골인들은 ‘신의 화살’, 투르크인들은 ‘하늘의 기원을 가진 것’, 부랴트 서사시에는 ‘천신의 돌’, ‘하늘 아버지의 돌’이라고 말한다. 몽골의 신화에는 ‘엘스팅 터거엉’이라는 무당이 하늘에서 돌을 내려오게 하여 자딩촐로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자딩촐로는 아니지만 돌이 하늘에 기원을 가지고 있다는 관념의 한 예는, 테무진이 태초오드 사람들을 피해 보드항 할동 산으로 피해 있다가, 숲에서 나오려 하자 앞에 커다란 흰 돌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하늘이 나를 막으시려는 것인가?” 하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테무진 앞에 놓였있던 흰 돌은 하늘의 돌이라는 관념이 내재되어 있다.

몽골인들에게 하늘은 모든 것을 운명짓는 전능한 힘을 지닌 영원한 상계의 아버지이다. 몽골어로 하늘인 “텡게르”는 곧 신을 뜻한다. 이것 역시 하늘 그 자체를 신성시했던 물신신앙의 하나임을 보여준다. 이렇게 자딩촐로는 하늘에서 기원했으며, 하늘에 속한 사물이기 때문에 신(하늘)이 갖고 있는 주술적인 힘과 초능력을 소유하고 있다고 믿었다. 이 돌은 일반인들이 사용하지 못하고 하늘로부터 특별한 능력을 부여 받았다고 여겨지는 자다치(자드를 잡는 사람) 혹은 무당이 자드를 사용하여 천기를 변화시켰다.

자딩촐로를 산에서 얻는다는 관점은 신성한 산과 특수한 어떤 돌을 신앙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본다. 자딩촐로가 동물에서 기원했다고 보는 입장은 자딩촐로가 동물의 머리에 혹은 배에 있다고 하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더르워드, 오량해, 알타이 사람들은 뱀, 사향노루, 오리, 원앙새의 머리 부분에서 이 돌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자딩촐로를 동물의 머리에서 얻는다고 기록된 자료가 매우 드문 것을 보면 이것은 그렇게 일반적인 관념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자딩촐로가 동물의 배에 있다고 보는 것은 상당히 보편적이었다. 13세기 기록에 “특별히 소나 말의 배에서 얻은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한 것을 보면 몽골인들에게 이러한 견해는 매우 분명했던 것 같다.

게.엔.포타닌의 기록에 의하면 진짜 자드인지를 알기 위해 손에 잡아보면 참을 수 없이 차가움이 느껴진다고 하며, 귀에 놓아보면 “챙”하는 소리를 낸다고 한다. 자드를 강물에 빠뜨리거나 해를 보게 하는 등 부주의하게 사용되면 엄청난 양의 눈이나 비가 오고, 자드의 마법적인 힘이 강하면 눈이나 비, 폭풍 등을 잠재울 수 있다고 한다.

딩촐로는 대부분 처음 얻은 동물의 가죽에 싸서 보관하거나 늘 자신의 몸에 지니고 다니는 전통이 있었다. 게.엔.포타닌은 그의 저서에서 자딩촐로는 오랫동안 보관을 하면 마법적인 힘이 떨어지는 것에 관해 또 그 힘을 회복시키는 방법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 돌은 보통 3년 정도 주술적인 힘을 지니며, 그 이상의 기간이 지나면 그 힘이 떨어진다고 한다. 능력을 회복시키는 방법은 처음 그 돌을 얻었던 동물류를 사냥하여 그 동물이 숨을 거둘 때 자딩촐로를 그 숨에 가져다대어 숨기운이 스며들게 하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어떤 가정과 집안에서는 이 돌을 대대로 물려 귀하게 간직한다고 한다. 이 자딩촐로는 천기만을 변화시켰던 것이 아니라 아기의 태를 자르는 데도 사용했으며, 아기의 요람에 달아주어 사귀를 막는데도 이용되었다. 또 고향을 떠나 먼 길을 가는 사람이 고향의 특수한 모양의 돌을 귀하게 지니고 가면 질병이나 어려움,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밖에 특수하게 생긴 나무나 버드나무, 자작나무, 막대기와 화살, 화살촉 등을 신성시했다.

위와 같은 돌신앙은 바위신앙으로 이어진다. 울란바타르에서 약 80km 떨어진 투브 아이막의 세르게렝 솜에 가면 ‘에에쯔 하드’ 라 불리는 어머니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치마를 입은 여인의 모습 하고 있으며, 목이 떨어졌던 것을 최근에 새로 붙여 놓았다. 추위가 풀리면 이곳을 찾는 인파가 장사진을 이루는데, 사람들은 어머니 바위에게 가장 좋은 것으로 공물을 드리고, 진심으로 자신의 소원을 간구하면 ‘어머니’께서 그 소원하는 바를 반드시 성취시켜 준다고 믿는다. 어머니 바위는 무당들의 성소이기도 하며 초여름 15일에 제의를 행한다.

이 ‘어머니 바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이 지역 사람들은 옛날부터 이 바위를 ‘아브개 바위’라고 했다. 옛날에 이 지역에 3마리의 푸른 염소를 가지고 있는 한 노파가 살았다. 여름이고 겨울이고 이 3마리 염소에게서 젖이 나왔기 때문에 그 젖을 짜서 생활했다. 그뿐 아니라 가난한 이웃의 사람들에게도 젖을 나누어주어 생활하도록 했다. 사람들은 노파에게 감사하며 그녀를 덕스런 어머니처럼 생각해 ‘어머니’라고 불렀다. 그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밤 노파가 앉은 채로 죽어 큰 돌로 변했다. 그녀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람들은 매우 슬퍼하며 그 바위를 ‘아브개 어머니 바위’라고 불렀다. ‘아브개’란 나이든 사람을 높여 부르는 칭호이다. 사람들은 그 바위에 제물을 드려 섬겼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오른쪽 귀에 어머니만 듣도록 속삭여 소원을 빌었다. 세 마리 푸른 염소도 주인 옆에서 푸른 돌로 변했다고 한다. 이 바위에는 병을 치료해 주는 능력이 있다 하여, 어머니 바위를 찾은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신체 가운데 좋지 않은 부분을 문지르며 치병을 소망한다. 어머니 바위에게 소원을 비는 것이나 바위에 몸을 비비며 치병을 소망하는 것은 페티시즘이 변형된 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바위에 대한 치병 기원은 돌에 주술적인 힘이 있다는 원시 신화적인 관념 이외에 실제적으로 돌에 특수한 방사선 성분이 있어 치료 효과를 준다고 한다.

바위는 자애로운 어머니나 할머니뿐 아니라 노인으로도 신앙시된다. 아르항가이의 테르힝 차강 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위를 ‘할아버지 바위’라고 부르며 호수를 지켜준다고 생각한다. 또 무당의 시조인 다양데레흐는 칭기스칸의 딸을 훔쳐 달아나다가 바위가 되었다는 신화가 있다. 사람뿐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온 소가 사람들을 위협하는 독사를 누르고 검은 바위가 되었다는 전설도 있는데, 현재 이 돌은 아르항가이 아이막의 체체륵 솜에 있다고 전한다.

바위는 신의 거처이기도 하다. 부랴트 무속에 따르면 바이칼 호수의 작은 섬에 있는 ‘무당 돌사당’이라는 제의를 드리는 바위 절벽에는 신의 열세 아들이 깃들여 살며 부랴트 민중의 삶을 지켜준다고 한다.

돌은 탄생과도 밀접한 상관관계가 있으며 한국처럼 기자석 신앙이 있다. 또 서사시의 영웅들은 대개 돌에서 탄생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돌의 모태 신앙을 보여준다. 또 아르항가이의 언더르 쉬웨트 산의 테브흥 사원에 가면 ‘어머니 자궁’ 바위가 있는데, 바위의 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나오면 새로 태어난 존재가 된다고 믿는다. 저자가 그곳에 가서 구멍으로 기어들어가 나와서 앉아 있는데 50대 가량의 한 남자는 그 구멍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당신과 나는 동갑이 되었다”며 웃어, “우리는 같은 날 태어났으니 특별한 운명의 친구네요.”라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9.30

몽골 신앙과 종교 - 대지와 산천신 신앙 
 

어치르반 산에서 발원하는 성수

이러한 물신신앙이 발전하여 자연물에 인간이나 동물 형태의 초월적인 존재가 거한다는 관념이 생겨나게 되었다. 대지에는 지모신(에투겡 에흐), 하늘에는 천신(텡게르), 물에는 수신(로스), 산에는 산의 주인(사브득)이 거한다는 믿음이 그것이다.

몽골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산과 물 신앙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수신과 지신을 함께 로스ㆍ사브득이라고 이른다. ‘로스’는 뱀의 형태를 지니는 수신을 이르는 말이며, ‘사브득’은 ‘흑, 먼지’를 이르는 티베트어로 ‘산의 주인’을 이른다. 대모신과 천신은 음양의 질서를 조화시킨 관념적 사고에서 발생했는데, 이러한 자연신들은 샤미니즘이나 불교 속에 습합되어 전승되어 왔다.

자연 신앙 가운데 물과 땅에 대한 신앙이 가장 보편적인 형태이다. 물에 대한 신앙 가운데 성수(聖水) 또는 약수를 이르는 ‘아르샹 오스’는 일반적으로 불사(不死)의 물, 영생(永生)의 물이라 하여 매우 귀한 것으로 생각하며, 주로 치병이나 신앙 또는 종교 의식용으로 사용한다. 몽골 신화에 ‘아르샹 오스’는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주는 영생수로 나타나기도 한다. 옛날에 천 년을 살고 있던 솔하나이라는 사람이 신께 영생수를 구하러 간다. 길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에게 물을 따라주며, 이것을 마시면 영원히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또 신이 인간을 만들고 그에게 생명을 불어넣기 위해 ‘영생수’를 구하러 가는 신화가 있다. 상록수에 관련된 몽골 설화에는 신이 인간에게 주려 했던 영생수를 그것을 전하려고 가던 새들의 실수로 인간에게 전하지 못하고, 나무에 떨어뜨려 그 나무가 상록수가 되었다고 말한다.

몽골 사람들은 ‘아르샹 오스’ 뿐 아니라, 물자체를 매우 신성하게 생각하여 물을 더럽히는 어떠한 행위도 일체 금했다. 우물이나 샘물에 피나 가축의 젖, 마유주 등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한다. 만약 이러한 것들이 물에 떨어지면 수신이 진노하여 물이 마르거나 더러워진다고 생각한다. 칭기스칸의 대법령인 <이흐 자삭>에 물을 향해 재를 뿌리거나 방뇨하는 자는 엄벌에 처한다고 규정했다. 또 뇌우를 불러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봄, 여름으로 물에 들어가거나 흐르는 물에 손을 씻지 못하도록 했다. 이상한 일처럼 들리지만 의복을 세탁해서는 안 되고 해어질 때까지 입어야 한다고 했다. 
 
그밖에도 우물 위에 함부로 걸터앉지 않으며, 우물 바가지나 두레박의 끈이 땅에 끌리지 않도록 하며, 우물에서 퍼올린 것을 다시 우물에 붇지 않는데, 이것은 모두 물이 오염되는 것을 경계하는 금기들이다. 또 우물 옆에 있는 구유를 비워두지 않는데, 가축에게 물을 마시게 한 뒤 다시 물을 가득 채워둔다. 이렇게 목마른 가축에게 덕을 베풀면 우물물이 줄어들지 않는다고 사람들은 믿는다. 또 여자가 우물 입구에서 다리를 벌리고 서 있는 것을 금기시하는데, 그렇게 하면 샘이나 우물물에 부정이 탄다고 여기거나 수신이 진노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모든 종류의 금기는 물을 신성시하는 몽골인들의 보편적인 사고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로스ㆍ사브득은 자신의 신성한 지역을 더럽히거나 해치지 않으면 움직이지 않으나, 그렇지 않으면 인간들에게 해를 미친다고 생각한다. 몽골인들 가운데는 물이 풍부했던 아름다운 자연에 사람들이 많이 찾아와 더럽히면 그 물길이 몸을 감추고 숨어버린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수’ (아르샹 오스)가 솟는 샘에는 어떤 숨은 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여, 공물을 드려 제의를 드리는 풍습이 있다. 이 샘 주변에 하득을 걸고, 오물을 버리거나 가축의 젖 등을 떨어뜨리는 것을 금한다. 몽골 고대인들은 산 혹은 강, 큰 호수가 있는 곳을 제의소로 삼아 제의를 드렸던 역사가 있다. 호수에 제의를 드린 후에 그 호수의 물고기를 잡거나 주변을 더럽히는 행위를 금했다. 물을 배경으로 하는 신앙처는 인간들이 자신의 삶을 가호해 달라고 신께 바친 절대적 신성공간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신령한 곳에서 부정한 행동을 하면 재앙이 이른다고 생각했다.

대지에 대한 신앙은 산에 대한 신앙 형태가 지배적이며, 산에는 산신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면, 헙드와 고비알타이의 경계에 있는 만년설로 덮인 소태 산의 주인은 흰 소를 탄 여인의 모습으로 관념된다. 울란바타르의 버그드 산의 주인은 새의 왕 항가리드인데, 때로는 사슴을 탄 백발의 노인이라고도 한다. 북쪽의 칭겔테 산의 주인은 푸른 소를 탄 푸른색의 할아버지로 매우 술을 좋아한다고 하여,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 전에 성긴 하이르항의 산신에게 먼저 술을 뿌려 드린다고 한다. 또 더르너드 아이막의 할하 강 유역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보이르 호수의 주인은 흰 옷을 입은 여인이며, 그녀는 호수 북쪽의 한 바위 위에 앉아서 사람들에게 자비와 은혜를 베풀고 있다고 말한다.

이렇게 땅 내지 산에 대한 신앙은 물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울란바타르의 버그드 산을 왕 즉 ‘버그드 항 산’이라고 부르며, 그 앞을 흐르는 토울 강을 왕비 즉 ‘하탕 토올’이라고 하여, 산과 물에 대한 신앙이 음양의 조화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몽골 사람들의 자연 신앙은 매우 일상화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몽골 사람들은 아침, 점심, 저녁에 젖이나 차의 가장 좋은 것을 그 지역의 산신이나 지신께 올리는 풍습이 있다. 이렇게 신께 젖이나 차를 올릴 때는 공중으로 뿌려 드리는데, 이것을 차찰 또는 사찰이라고 한다. 차찰이란 ‘흩뿌린다’란 의미의 ‘차차흐’ 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가축의 젖이나 술을 자연 신께 뿌려드리는 신앙적 행위는 일반적으로 뿌리는 행위를 말하는 차찰과 구별하여 ‘사찰’이라고 한다.

사찰은 목축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며, 젖의 첫술을 천ㆍ지신ㆍ산천신께 드려 신을 위무하고 감사를 드리며, 자비와 축복을 구하는 의례이다. 사찰을 드릴 때는 단지 드리는 행위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천신ㆍ산신을 향해 사찰을 드리며 소원하는 바를 짤막한 시로 말한다. 식구 중 누군가 먼 길을 떠날 때 말의 등자에 가축의 젖을 떨어뜨리거나 떠나는 자의 등 뒤에서 젖을 뿌려 올림으로서 가는 길의 안전을 빌어주기도 한다.

사찰은 드릴 때는 유제품이나 차뿐 아니라 곡식이나 술을 올리기도 한다. 이 사찰 의식은 어디를 가나 많이 볼 수 있는 모습인데, 좁은 장소에서 간단히 부릴 때는 약지(藥指)로 공중을 향해 세 번을 뿌린다. 몽골인들은 3이라는 숫자를 좋아하며, 여러 가지 생활 또는 의례 속에서 주로 3번을 행하는 풍습이 있다. 그래서 “몽골 3”이라는 말이 있다. 3은 천ㆍ지ㆍ인ㆍ 혹은 천계ㆍ인간계ㆍ지하계의 삼계를 상징한다. 사찰을 드릴 때는 손으로 혹은 손가락을 사용하지만 때로는 유승 누드테 할박가(9개의 구멍을 가진 주걱)를 이용해 한 번 혹은 10번을 올린다. 이 사찰의 도구로 한 번 뿌려 올리면 9번, 열 번을 뿌리면 99번을 올리는 셈이 된다. 이 때 9수는 하늘 수의 상징성을 지닌다.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0.7

몽골 신앙과 종교 - 토테미즘   
  

몽골의 자연 신앙이 발전하여 나타난 한 형태는 토테미즘이다. 토테미즘이란 고대인들이 어떤 한 동물이나 식물을 자신의 조상의 기원과 관련을 가지 신령한 종교적 대상물로 삼는 신앙적 풍습을 말한다.

토템이란 오지브와족의 단어 ‘오토테만’ 에서 유래한 것으로, 이것은 원래 형제, 자매의 혈연관계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토테미즘은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자연 대상물이 인간과 신비한 관계 내지는 친족 관계가 있다는 믿음 위에 기초한 것으로 고대의 많은 원시 부족들 사이에서 중요한 종교적 역할을 수행해 왔다.

토테미즘은 이러한 종교적 역할 이외에도 금기 또는 타부시하는 일정한 행동을 사회적 규범화 함으로써, 사회 불문율을 형성하게 되고 사회 구성원들의 일체감을 형성하면서, 도덕적 생활의 규준이 되기도 했다.

고대인들의 신앙적 태도는 주변 환경과 그에 대응하는 생활 방식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예를 들어, 인간 삶의 주변에서 위협을 주거나 영향을 미치는 맹수나 그 밖의 동물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이 인간의 삶을 지켜주며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었다. 이것은 특정 동물을 인격화 또는 신격화함으로써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많은 문제를 주변 생물체와 함께 해결하려는 적극적인 삶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토템 신앙은 기원 면에서 인류 사회 발전의 초기 단계인 고대 씨족이나 부족 형성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신앙적 전통은 세계의 각 민족마다 서로 다른 형태를 가지면서 전승되어 왔다. 몽골은 영토에 비해 인구가 아주 적은 편이지만, 광대한 지역에 흩어져 사는 많은 부족들이 있기 때문에 토템의 종료도 그만큼 많다고 할 수 있다.
 
* 늑대와 토템 *
몽골족은 중앙아시아의 드넓은 초원에서 유목생활을 하며 동물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살아왔다. 몽골의 대표적인 부족인 히야드 버르찌깅 부족의 토템인 부르테 천(늑대), 허아 마랄(사슴)은 몽골 고원에 풍부하게 서식하는 잿빛 늑대, 실제로 이 지방에 서식하는 사슴의 한 종류인 붉은 사슴을 이른다고 학자들은 본다.

부르테 천, 허아 마랄은 히야드 부족의 지도자들을 이르는 명칭으로 보는데, 이것은 고대에 부족이나 부족장을 토템 동물로 대표하여 불렀던 것과 관계가 있다. 몽골의 오이라드 처러스 부족의 토템은 버드나무를 어머니로, 올빼미를 아버지로 생각한다. 호리 부랴트인들은 백조와 자작나무를 토템으로 여긴다. 히야드 부족의 토템인 늑대는 우회적으로 ‘누런 개’라고 불리기도 한다. 부랴트의 신화에 나오는 부르테는 개를 이르며, 몽골의 최초의 무당은 부르테라는 노인이었다고 한다.

몽골의 베르시드 부족의 조상은 어떤 호수 근처의 숲에 살고 있던 늑대와 사슴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보는데, 베르시드는 [몽골비사]에 나오는 ‘베수드’ 부족의 이름과 유사하며, 이들 부족명은 늑대와 모종의 관련을 갖고 있다고 본다. 토템 동물의 이름을 자신들의 부족명으로 삼는 풍습은 세계의 민중들 가운데 상당히 널리 퍼져 있으며, 할하 사람들의 부족 이름에 늑대 토템의 이름이 지금까지 전승되어 온다. 또 몽골의 귀족 가문의 부족 <버르쯔깅>이라는 명칭 역시 늑대 토템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최근 연구자들에 의해 발표되었다. 늑대에 관련된 것은 이름뿐 아니라 칭호에서도 나타나는데, 늑대를 토템으로 신앙하는 부족 사이에서 나이 많은 노인에게 “베르테 천” (회색의 이리) 이라는 칭호를 주고, 여자에게는 ‘허 마랄’ (아름다운 사슴)이라는 칭호를 주는 관습이 있었다고 한다.

몽골 사람들의 고대 부족, 즉 흉노와 위구르 사람들도 자신들의 토템을 늑대라고 생각했다. 흉노의 왕은 한 왕비에게서 아름다운 두 딸이 태어났을 때, 그들을 인간의 어머니가 되게 하지 않고, 신의 제물로 드리리라 결심하고 인적이 없는 고립된 곳에 집을 지어 살게 했다. 작은 딸은 거기서 늑대와 만나 살게 되며, 이들은 점점 성장하고 번성하여 한 부족국가를 이루게 된다. 그들의 후손들은 나중에 장가를 부를 때 늑대처럼 소리를 내며 자신들의 조상을 묘사했다고 한다.
어거대칸은 이슬람교도들이 잡은 늑대를 천 랑(37.3=37.3kg)으로 사서 놓아주었을 뿐 아니라 이 소식을 들려준 사람에게도 많은 양을 상으로 주었다. 놓아준 늑대가 다시 사냥개에게 붙잡히자 어거대칸은 매우 슬퍼하며 자신에게 불길한 일이 생길 징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늑대의 위기 상황을 자신의 운명에 곧바로 전가시켰던 것은 늑대 토템 신앙을 반영한 태도라 할 수 있다.

할하 사람들의 전설과 여러 가지 풍습, 의례에 늑대를 사냥하거나 늑대로부터 가축 떼를 보호하는 것과 관련된 여러 가지 생활 의례가 많이 나타나는데, 이러한 의례 속에는 늑대를 토템으로 생각하는 고대 사유(思惟)가 다분히 내포되어 있다. 장사나 길을 잃은 가축을 찾으러 갈 때 등 어떤 행위를 목적으로 집을 떠나 길에서 늑대를 만나게 되면 길조로 생각하여 원하는 일이 잘 될 것이라고 기뻐한다. 또 늑대가 가축 떼에 들어가 가축을 잡아먹는 것을 그렇게 나쁘게 보지 않았으며 큰 피해로 여기 않았다. “늑대의 입은 넓고, 도둑질하는 손은 검다.”라고 하여 늑대의 행동을 도둑질하는 행위 위에 두어 비유한다. 할하 부족의 경우, 아이가 태어나 계속 죽는 집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늑대의 힘줄로 탯줄을 싸고, 늑대의 복사뼈를 아이에게 걸어주면 좋다고 생각했다. 또 늑대의 가죽으로 아이를 싸기도 하는데, 이러한 행위들은 늑대가 그 생명을 악마로부터 보호해 줄 것이라고 믿는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아이에게 샤알로(늑대 인간), 벨트륵(새끼 늑대)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면 아이가 별 사고 없이 잘 자란다고 하여, 이런 풍습을 적지 않게 지키고 따라왔다. 늑대와 관련된 이런 것들은 위험한 재앙을 가져다주는 악귀(惡鬼)를 막기 위한 일종의 수호부적의 성격을 지닌다. 또한 이러한 행위 뒤에는 늑대 토템의 신앙적 관념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늑대의 야생적인 파괴력과 강인함은 유목민들에게 있어 경계의 대상이 되는 동시에 무한한 외경의 존재가 되어, 조상식으로까지 숭앙되었다. 늑대 토템은 그 강한 힘으로 부족을 지켜준다는 수호신적인 의미를 지님과 동시에 부족 자체를 늑대와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부족의 강인함을 부각시키는 부족 표징의 상징성을 갖기도 했다.

늑대와 같은 유(類)인 개(너허이)를 토템으로 숭앙하는 부족도 있다. 일반적으로 늑대와 개를 존귀하게 여기는 토템 신앙은 몽골족뿐만 아니라 그 밖의 많은 민중들 가운데 보편적으로 퍼져 있고, 지금도 어얼드 사람들 가운데는 ‘너허이 보잉트’라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있어 개를 토템으로 했던 잔영을 보여준다.

[몽골비사]에 개와 관련된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알랑고아 어머니는 남편 더보 메르겡이 죽은 후 남편도 없이 보하-하타기, 보하토-살찌, 버등차르-몽학이라는 세 아들을 낳는다. 본 남편의 두 아들 벨구누테이, 부구누테이 형제가 이들은 분명 집 안의 종인 말릭 바이고오드씨족 사람의 아이들일 것이라고 의심하자, 어느 봄날 그녀는 아이들에게 형제가 서로 협력해 살아가야만 앞날을 헤쳐나갈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말하면서, 이 세 아이들은 빛이 배에 비쳐서 얻은 하늘의 혈통을 가진 아이들이라고 말한다. 즉, 그녀는 “밤마다 누런빛의 사람이 게르(몽골의 전통 가옥)의 환기구와 문미 틈새로 들어와 나의 배를 만질 때 그의 빛이 나의 배에 스며들었고, 그 사람은 달이 지고 해가 뜰 무렵에 누런 개처럼 꼬리를 아래로 흔들며 나간다.”라고 한다.

개를 존숭하는 예절은 몽골의 많은 부족의 결혼 풍습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집안에 며느리를 맞이할 때 시아버지는 화로의 불에 절하게 한 다음 개에게 절하게 하는 풍습이 전한다. 더르워드 부족의 결혼 풍속에는 며느리를 맞이하는 의식으로 며느리가 게르 안에서 생가죽 위에 앉아 있으면 밖에서 시아버지가 신랑의 형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개를 끌고 게르에 들어가게 하는데, 며느리는 게르에 들어온 개의 목에 흰색의 천을 묶고 속옷 자락을 펴고 거기에 고기, 기름을 놓아 개에게 먹여 나가게 한다. 이것은 며느리를 자신의 부족으로 받아들일 때 조상신이며 수호신인 개에게 고하고 그 신을 귀하게 받드는 의식이라고 한다.

개를 존숭하는 풍습은 대한 연구자들의 견해처럼 흉노, 거란 등의 고대 몽골계 부족에 개 토템이 있었다는 것과 연관하여 생각할 수 있으며, 개 토템은 몽골 이외에 동시베리아의 약코트, 중앙아시아의 투르크멘들에게도 보편적으로 존재했던 토템 형태이다.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0.14

몽골 신앙과 종교 - 사슴 토템과 백조 토템 
 

사슴 토템
사슴은 늑대와 함께 몽골의 황금 가문(왕족)의 직계 조상으로 등장하며, 몽골 전역에 걸쳐 나타나는 보편적인 토템이다. 사슴을 신성한 존재로 신앙하는 풍습은 몽골 이외에 알타이, 오량해, 키르기즈에 널리 펴져 있다.

몽골인들은 사슴을 가장 순수하고 고귀한 동물이라고 여겼으며, 그 모습을 보게 되면 좋은 일이 생길 징조라고 생각한다. 몽골 서북쪽 다르하드의 무당들과 바르가, 차하르, 허르칭 부족들은 최근까지도 사슴을 수놓아 장식하고, 사슴의 뿔 부분을 무당의 북과 의식용 모자에 달았다.

사슴은 장수하는 동물로 사슴을 많이 죽이면 인간의 수명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하여 죽이는 것을 꺼렸다. 사슴을 죽인 경우에 대가리를 나무에 걸어 남겨두어 사슴을 존숭하는 풍습이 있으며, 뿔 끝이 보이는 쪽에서 세 번 절하고 축복을 받는 전통이 있다.

사슴을 존숭하는 또 하나의 예는 암사슴이나 수사슴의 어금니를 신성시하며, 아이들의 옷이나 장난감에 묶어 달아주는 풍습이다. 또 사슴의 위에는 희고 조금 어두운 두 가지 색의 돌이 있는데 이것들은 비나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등 천기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돌-자딩촐로-이라고 하여 특별한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사슴에 대한 토템 신앙을 잘 보여주는 고대인의 기념물 중 하나는 사슴돌이라고도 하는 사슴상이다. 사슴상은 청동기시대 부족의 수장 등 부족의 주요 임무를 수행했던 자, 지배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의 무덤에 앞에 세운 석상으로, 이 석상에 사슴을 새겨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몽골의 고대인들의 관념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은 천계로 올라가고 육신은 땅에 남는다고 보았으며, 죽은 혼이 하늘로 올라가는 것을 상징하는 사슴의 모습을 돌에 형상화했다.

동물 모형에 대한 예술적인 기원은 부족민들이 신앙하는 토템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사슴돌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 혹은 그들 부족이 사슴으로부터 나왔다고 보는 토템 신앙과 관련이 있다. 이렇게 사슴의 모습을 새겨 넣은 돌을 무덤에 세우는 행위는 비록 이 생을 떠나지만 부족의 토템인 그 동물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들 사슴돌에 새겨진 사슴의 모습은 주둥이 부분을 새처럼 표현한 것을 풍부하게 만날 수 있는데, 대체로 태양을 향해 질주하는 형상을 하고 있다. 어떤 사슴돌에는 사슴 이외에 백조나 들기러기 등의 동물도 그려져 있지만 사슴의 모습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 배치하고 있고, 비석들 위에는 ‘태양’을 묘사한 원형의 형상을 그리고 있다. 이것은 그 시대의 신화 또는 세계관에 태양과 그와 관련된 천계의 사슴이 주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해 이것은 태양이 상징하는 영원한 하늘에 대한 관념을 하늘에 기원을 둔 조상신인 사슴과 관련하여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슴을 형상화한 기념물에는 사슴돌 이외에 바위그림에서도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있다. 울란바타르시 남쪽에 있는 버그드 산 ‘이흐 텡게르’ 골짜기 어귀에는 바위가 있는데 몽골의 전통 의상을 입고 있는 여성과 함께 얼룩 사슴이 그려져 있으며, 이것은 사슴을 몽골인의 시조모인 ‘고아 마랄’ (붉은 사슴)과 동일시하여 보여주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사슴은 몽골족의 모성 상징의 고대 토템 형상으로 나타난다.
 
백조 토템
동물은 신앙하는 고대 풍습의 한 자취는 새와 깊은 관련이 있다. 여러 가지 종류의 새를 존귀하게 여기지만 물새를 신앙시하는 전통은 상당히 널리 펴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백조에 대한 신앙이 지배적이다. 백조는 행운을 가져다주며, 그 노래 소리를 들으면 장수한다는 속신이 있다.

홉드 아이막의 자흐칭 부족 사람들은 백조를 죽이는 것을 금기시한다. 백조가 열지어 날아갈 때 부인들은 성장(盛裝)을 하고 나가 가축의 젖을 하늘을 향해 뿌리며 백조를 존숭하는 예를 드린다. 바이드 부족 사람들도 물새 가운데 백조를 가장 길하게 여기며, 사람들은 “우리의 조상인 백조여, 고향의 맑은 성수(聖水)에서 평화롭게 헤엄치며, 자손을 번성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백조를 부르며 젖의 첫술과 유제품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드리는 풍습이 있다.
 몽골의 여러 부족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백조라고 생각하는데, 호리 부랴트 부족의 기원 신화는 이러한 사실을 잘 반영해 준다.

아주 오랜 옛날 부르트 천 가문의 바르가라는 귀족에게 이료다르 투멩, 부리아대 메르겡, 호리대 메르겡이라는 세 아들이 있었다. 이들은 수렵 생활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어느 해 전쟁이 나자 그들은 각각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흩어져 살게 된다. 큰 아들 이료다르는 두 동생과 사이가 나빴기 때문에 서쪽으로 갔고, 두 동생은 각각 바이칼 호수 북쪽과 남쪽에 가서 살았다. 바이칼 호수 남쪽에 가서 살던 호리대 메르겡이 어느 날 바닷가에 물고기를 잡으러 갔는데, 창공에서 세 마리의 백조가 바닷가로 내려왔다. 세 마리의 백조가 날개옷을 벗자 여인으로 변해 바다에 뛰어들어 헤엄치며 즐겁게 노는 것이 아닌가. 너무도 놀랍고 신기한 일이었다. 호리대 메르겡은 물 속에서 노는 그 아름다운 여인들을 바라보자 참을 수 없는 욕정에 사로잡혀, 여인들이 벗어 놓은 옷 가운데 한 벌을 몰래 감추어 둔다. 놀기를 마친 두 여인은 날개옷을 입고 날아가지만, 옷을 잃어버린 한 여인은 하늘로 날아가지 못하고 호리대 메르겡의 아내가 된다. 호리대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으나 그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백조 아내에게서 다섯 명의 아들을 낳게 된다. 그리고 세 번째 아내를 맞아 8명의 아들을 낳지만 2명은 어려서 죽어, 백조 아내에게서 난 아들 5명과 함께 11명의 아들이 자라나 모두 결혼하여 각각 부족을 형성하게 된다. 이들 삼촌의 이름이 부랴트였고, 아버지의 이름이 호리대였기 때문에 후세들은 자신들을 호리 부랴트라고 불렀다.

이렇게 하여 백조 아내와 호리대 메르겡은 세월이 흘러 늙은이가 된다. 할머니가 된 백조 아내는 남편을 졸라 젊었을 때 자신이 입었던 날개옷을 한번 보여줄 것을 간청하자, 호리대는 이제 늙었는데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그 옷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는 옷을 입고 장신구를 달더니 겔의 환기구를 통해 하늘로 날아가 버리고 만다. 그녀가 낳은 아들과 세 번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 11명은 후에 호리 부랴트의 11부족이 되는데 이들 부족들은 자신들이 백조에게서 기원했다고 말한다.

동물을 숭배하는 행위는 기원적인 면에서 씨족이나 부족의 형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토템 신앙은 고대인의 정신적인 면과 실제적인 삶의 측면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미쳤으며, 현재까지도 생활의 저변에 토템 신앙의 잔영이 짙게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몽골의 토템 신앙의 중심 자리에는 ‘늑대’와 ‘사슴’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 밖에 ‘개’, ‘백조’, ‘송골매’ 등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 토템은 기본적으로 하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이러한 성격은 후에 무속신앙으로 흡수, 동화되는 조건을 형성한다. 몽골의 늑대 토템은 사슴 토템과 배우 관계를 이루고 있으며, 이 두 토템은 몽골 이외에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의 토템이 되기도 한다. 이 두 동물은 몽골 민중의 자연 환경, 생활 조건 등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으며, 늑대는 빠르고 사나운 맹수의 속성으로 인해 외경과 경계의 이중적인 관념을 낳았고, 사슴은 우아한 자태와 고귀함 그리고 장수의 속성으로 인해 천계의 존재로 숭앙되며, 천기(天氣)를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 수신(水神)의 성격을 갖기도 한다.

이규보의 [동명왕편]을 보면 주몽이 송양왕과 다투는 과정에서 흰 사슴을 잡아 해원의 큰나무에 거꾸로 매달아 놓고 주문을 외운다. 그러자 사슴이 슬피 울어, 그 소리가 하늘에 사무쳐 큰 비가 이레를 내렸다고 나온다. 이것 역시 사슴의 수신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일화이다.

늑대와 사슴은 몽골의 황금 가문의 직계 조상으로 나타나며, 이들은 몽골인들의 수호신으로 여러 풍습 속에서 특별한 의미와 상징성을 갖는다.

백조는 ‘하늘의 선녀’라는 관념이 있었으며, 흰색을 순결하고 고귀하게 보는 몽골인들에게 백조는 여타의 새 가운데 가장 고귀한 새로 숭앙된다. 백조에 대한 토템 신앙은 사슴돌에 백조가 등장하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백조에 관한 설화는 우리나라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와 같아 흥미를 끈다.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0.21

몽골의 신앙과 종교 - 불 신앙
 
고대 몽골인들은 불을 모든 것을 정화시키는 능력을 지닌 ‘자연의 힘’이라고 생각해 왔으며, 가장 순수하고 성스러운 것, 만물을 이루는 원소라고 보았다. 또한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인간까지 정화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몽골인들이 언제부터 불을 신앙시했는지에 대해 만족할 만한 자료가 지금까지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도르찌 반자로프는 몽골인의 불 신앙이 페르시아와 투르크에서 전해졌다고 보았다.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를 일반적으로 배화교(拜火敎)라 이르는데, 이 종교는 신전의 불을 지키는 것이 예배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조로아스터교는 B.C 6세기 경 종교 개혁가인 자라투스트라에 의해 창시되었다. A.D 224년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한 페르시아의 사산 왕조가 출현하면서 국교가 되었다. 페르시아의 불 신앙이 어떤 경로에 의해 몽골에 전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몽골의 신화 속 최고 신인 ‘호르마스트 신’의 명칭이 조교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에 나오는 지고신 ‘아호라마즈다’에서 온 것이라고 본다. 이것으로 보면 몽골의 불 신앙이 페르시아 종교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으며, 투르크의 불 신앙 역시 그들과 생활 무대를 같이 했던 몽골인들의 신앙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몽골인들에게 불은 지상의 것이 아닌 천상의 것으로 인식되었으며, 그것은 그들의 신화 속에 반영되어 있다. 신화적으로 보면, 불은 원래 천상계의 것이었는데 지상에 사는 사람들이 상계 사람들로부터 훔쳐온 것이라고 말한다. 고대에는 위대한 것, 인간들의 숭앙 대상이 되는 것의 기원을 하늘에 두었는데, 불 역시 이러한 숭배 사고를 반영한다.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신화에 불은 신과 인간을 중개하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신화적 관념은 몽골 샤머니즘에도 잘 나타나 있다. 불은 무당들의 신앙적 대상 가운데 가장 중요한 신앙물에 속한다. 무속 신화 가운데 “아주 오랜 옛날에 세상이 개벽할 때 무질서했던 하나의 실체가 두 부분으로 나뉘어 한 부분은 모든 것을 생성시키는 자 곧 하느님 아버지가 되어 위로 날아 올라가고, 다른 하나는 모든 형태를 이루게 하여 인간들로 하여금 생활을 영위하게 하는 어머니 대지가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 대지께서 오디나무에 불을 일으키자 그 주위에서 인간이 생겨나고, 불꽃이 위로 타오르면서 부족과 나라가 이루어졌다.”라는 창조 이야기가 전한다. 이 신화에서 형상화하고 있는 창조의 불은 여성성, 창조성을 지니며 인간과 지상계 창조의 근원이라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불 신앙 내지 불 제의를 샤머니즘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으나, 불 신앙은 샤머니즘 생성 이전부터 존재했던 자연 원시신앙의 한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인들은 날마다 음식과 차 가운데 첫술을 하늘과 땅, 산과 물의 주인(사브득) 그리고 조상에게 올리는 풍습이 있다. 13세기 몽골의 특별한 생활 풍속에 대해 기리욤 데로브로키는 <동방 여행기>에서 “그들은 남쪽을 향해 땅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며 술과 성수를 세 번 뿌려 올리는데, 이것은 불의 수호신을 존숭하여 올리는 예이다. 동쪽으로 대기의 신, 서쪽으로 물의 신께 사찰(하늘을 향해 제물을 뿌려 올리는 행위)과 절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북쪽을 향해 술을 뿌려 올리는데 이것은 죽은 영혼에게 절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즉, 불 신앙이 자연 신앙의 한 연장선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상숭배와도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불에 절을 할 때 “은혜로운 부모님의 운명의 수호신께”라고 기원하는 데서 이러한 견해를 확인할 수 있다.

고대로부터 몽골인들은 불의 신을 ‘갈라이항 어머니’, ‘불 어머니’, ‘걸럼트 어머니’라고 불렀다. ‘갈라이항’이란 ‘불의 왕’ 즉 ‘불의 주인’을 뜻한다. 화신(火神)을 이르는 단어로는 ‘아르쉬 텡게르’가 있는데, 이 신은 높고 완전한 불꽃의 왕, 길상과 행운을 가진 존재로 표현된다. 원래 ‘아르쉬’란 산스크리트어로 ‘정직을 인도하는 자’라는 뜻으로 인도 베다 신화상의 신의 이름이며, 몽골로 와서 ‘명상자’, ‘불의 신’의 의미로 쓰였다. 또 ‘아그니 항’ 역시 산스크리트어로 ‘불의 주인’을 뜻하는 단어이다. ‘아그니 항’은 희망과 모든 복을 가져다주는 자일 뿐만 아니라 악하고 장애가 되는 모든 것을 멀리 쫓아내는 가장 순수한 자라고 보았다. 일반적으로 불의 신은 여성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모계사회 유습과의 관련 속에서 생겨났다고 본다.

* 갈 걸럼트 *                               
몽골에서 가계를 계승하고 집안의 불씨를 이어가는 아들은 막내이며, 막내라는 뜻의 ‘어트겅’은 투르크 기원의 단어로 ‘불의 왕’ 또는 ‘불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몽골인들이 고대로부터 막내아들을 어트겅, 어트겅바야르, 어트겅치멕 등으로 불러온 것은 막내아들의 특별한 권리를 부각한 이름이나 할 수 있다. 어트겅과 마차가지로 ‘어트치깅’이라는 이름도 많이 쓰인다. 칭기스칸의 막내 동생 이름은 ‘어트치깅’인데, 이 이름 역시 ‘불의 주인’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 단어는 후에 ‘어트겅’으로 바뀌어 쓰인다.

막내는 가정의 갈 걸럼트를 계승하며, 부모의 집을 지키고 가계를 잇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를 어떠한 정치적 이유로도 함부로 죽일 수 없었다. [몽골비사]에 의하면 칭기스칸은 삼촌, 즉 아버지 예수헤이 바타르의 막내 동생인 다리대 어트치깅이 자신을 배반했기 때문에 그를 처형하려고 한다. 그러나 측근 신하였던 버어르치는 “혈족을 해치는 자는 갈 걸럼트(불의 온상)를 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를 죽이는 것은 가계를 해지는 것과 같지 않습니까? 훌륭한 아버님의 가계에서 이 삼촌이 남으셨습니다.”라고 했다. 버어르치가 가계를 이어가는 막내의 역할을 상기시키자, 칭기스칸은 그의 말을 받아들여 삼촌을 용서하면서, “이 점을 잘 알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한다.”며 그에게 자비를 베푼다.

몽골에서는 가계를 계승하는 것을 ‘갈 걸럼트’를 지키는 것으로 표현한다. ‘갈 걸럼트’란 화로, 화로가 있는 중심자리, 고향, 가계 등의 의미로 전이되어 쓰이며, 가정의 갈 걸럼트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지키는 것을 나라의 갈 걸럼트를 지키는 것과 동일시했으며, 불을 지키고 계승하는 것은 나라의 힘과 존립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만큼 불에 대한 존숭감과 신앙심이 중시되었다.

일반적으로 한 가정에 세 명의 아들이 있는 경우 맏아들은 정치적인 일에 힘쓰고, 둘때 아들은 지식이나 종교적인 일을 위해 집을 떠나고 셋째인 막내는 집안에 남아 부모의 일을 도우며 갈 걸럼트를 계승한다는 말이 있다. 자식이 없다는 것은 가계가 끊어지고 갈 걸럼트가 꺼진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그 집은 “갈 걸럼트가 꺼졌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보통 아들이 없는 경우 손자가, 손자도 없는 경우 외손자를 데려다 갈 걸럼트를 잇게 했다.
자식이 장성하여 혼인을 하면 아버지의 집에서 불을 떼어가 갈 걸럼트에 불을 붙이고 새 가정을 이루는 풍습이 있다. 이때 아버지의 집을 ‘큰 집’이라 하여 매우 존중하며, 분가한 자식의 집을 ‘작은 집’이라고 한다. 분가하여 독립적인 가정을 이룬 자식에게 아버지는 ‘불의 자식’ ‘걸럼트의 자식’이라고 부른다.

가정을 이루는 결혼 잔치에 앞서 새로운 가정의 불을 붙이는 공식적인 의례를 행해야 한다. 식구와 손님들이 자리 잡고 앉으면 신랑 측의 형수가 젊은 신랑, 신부를 조용히 이끌고 게르로 들어온다. 그들은 집으로 들어와 미리 준비된 깔개에 앉는데, 신랑은 화로의 뒤편에 신부는 화로 입구 쪽으로 앉는다. 그렇게 앉으면 신랑은 아버지를 향해 “아버님, 불을 주세요.”라고 한다. 그러면 아버지는 “불로 무엇을 하려고 하려느냐?.”라고 묻는다. 아들이 “아버님의 불에서 불씨를 받아 새 가정에 불을 지피려고요.”라고 하면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며 부시(헤트)를 꺼내 아들에게 준다. 그러면 아들은 헤트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들고 부싯돌을 꺼내 부시를 쳐서 불을 일으킨다.

신부는 그 불을 받아 화로 옆에 준비된 소똥 등의 땔감으로 불을 붙이고, 그 즉시 솥을 걸고 새 가정의 최초의 차를 끓인다. 이것으로 갈 걸럼트에 불이 붙여지고 남은 의례가 행해지며 잔치가 계속된다. 새색시는 시댁의 제단에 모셔진 부처님과 갈 걸럼트, 시부모, 마유주, 가죽부대, 개 등에 절을 한다. 여러 예절 의식 가운데 가장 존중의 예법을 가진 것은 불에 절을 하는 예법이다. 이어 두 형수는 새 며느리를 이끌고 시아버지가 계신 게르로 들어가게 하여 화로의 왼쪽에 준비된 흰 에스기(양털로 된 펠트) 매트 위에 무릎을 꿇게 한다. 그리고 두 손에 흰색 주머니에 든 오색의 비단 조각, 비계, 버터를 불에 올리게 하고 화로 앞에서 세 번 절을 시킨다. 몽골 사람들은 화덕을 집안의 중심 또는 생명이라고 보고, 화덕의 세 개의 돌 또는 화로의 세 개 받침다리가 집의 가장, 안주인, 며느리를 대표한다고 보았다.

몽골인들이 불의 신을 ‘걸럼트 에흐’ (불 어머니)라고 부르며 신앙하는 것은 갈 걸럼트가 가정을 지속시키고 평화와 발전, 번성을 가져온다고 믿는 데 있다. 가정에 불이 있으면 가정이 번창하고 자손이 번성하며, 집에 불이 없으면 걸럼트는 퇴락하여 생활의 의미를 잃는다고 생각한다. 불은 신성한 순수한 정화의 상징으로, 삶에서 닥치는 재난을 물리치는 보이지 않는 힘이 불 속에 내재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에 사신이나 다른 지역의 이방인들이 오면 그들이 가지고 올 물건과 함께 양쪽에 피워놓은 불 사이로 지나가게 하여 정화를 시켰으며, 나쁜 잡균이나 재해를 가져올지도 모를 어떤 사악한 기운이나 위험을 경계했다. 불의 정화력은 단순히 물체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악한 생각이나 마음 따위도 정화된다고 믿었다.

갈 걸럼트와 뗄 수 없는 하나는 불을 피우는 ‘톨륵’이다. 일반적으로 화로를 톨륵이라 하는데, 이것은 무엇을 받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화로가 없던 고대에는 솥을 걸기 위해 받쳐 놓은 돌을 톨륵이라 했다. 그러다가 화식을 위한 시설이나 도구가 발전하여 세 개의 쇠를 땅에 박아 고정하고, 그것의 윗부분을 둥글게 연결하여 솥 따위를 쉽게 걸 수 있는 방법이 고안되었다.

그 후 여러 장식을 한 톨륵이 고안되고 만들어졌으며, 1930년대부터 연통이 없는 톨륵에서 연통이 있는 화로인 조오흐로 교체되기 시작했다. 장식을 가진 톨륵의 위쪽에 있는 받침 대 머리 부분의 까마귀 대가리 문양은 만주 지배기 몽골의 갈 걸럼트를 자신의 손에 장악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즉, 몽골인들이 가장 귀하게 여기는 갈 걸럼트를 그들의 토템인 까마귀로 쪼게 하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 반박하여 학자 엔. 세르-어드짜브는 톨륵은 오히려 만주의 압제를 이기기 위해 더욱 강한 쇠로 만들었으며, 톨륵의 문양에는 가축을 번성케 하는 상징적 의미가 들어 있다고 했다. 실제로 양 머리를 조형해 만든 톨륵은 이러한 번성의 상징을 보여주는 예이다.

몽골에서는 예전부터 불을 신이 깃든 것으로 외경하고 존숭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지혜, 뛰어남, 지성을 불로 비유했다. 영웅이나 총기 있는 사람을 묘사할 때 “얼굴에 불이 있고, 눈에 불꽃이 있다.”고 말한다. 또 몽골에서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날 때나 이동할 때 무리지어 각각 불을 지폈으며, 인격이 있고 경험이 풍부한 연장자 한 분을 ‘불의 어머니’로 삼은 것도 갈 걸럼트를 존중하는 몽골인의 생활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0.28

몽골의 신앙과 종교 - 불 신앙(2)
 
*** 불 제의 ***
몽골에서는 전통적으로 불신(火神)을 제의하는 것을 매우 중요한 의례로 생각했다. 몽골에서 불 제의를 드리는 시기와 신앙적 의미는 거의 공통적이지만 지역과 자연, 대기의 조건, 지역 민중의 특수성, 신분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다. 몽골의 화제(火祭) 풍속은 모든 가정에 화로의 주인, 즉 불의 신이 거한다는 믿음과 신앙에 근거한다. 예전에는 해마다 불에 제의를 드리는 자세한 규례를 가지고 있었으나, 오늘날은 잊혀지고 희미해진 풍습의 하나가 되었다.

일반적으로 몽골에서는 가장 크고 보편적인 불 제의를 12월 23일 또는 24일에 행하며, 때때로 봄에 제의를 드리기도 한다. 12월 23일에 화제를 드리는 것은 그 날 ‘불의 신’이 하늘로 올라가서 세상의 온갖 동물의 상태를 ‘호르마스트 신’께 고하는 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통 23일에는 평민들이 제의를 지내고, 24일에는 귀족이나 왕 등 상류층 사람들이 제의를 드렸다고 한다. 이렇게 제의 날짜가 차이가 있게 된 이유는 일반민들이 귀족들보다 하루 전에 도착해 제의를 드리고, 그 다음날인 24일에 귀족들이 도착해 불 제의를 드렸기 때문이라는 전설이 전한다.

고대인들은 불 제의를 드릴 때 화덕에 세 개 돌을 받치고, 털을 벗긴 어린 양의 배 부위 비계로 돌을 싸고 비계 위에 누런 버터를 떨어뜨려 불을 지폈다. 비계로 돌을 싸는 것은 완전한 양 한 마리를 제물로 드렸다는 의미를 지닌다. 후대에는 대부분 양의 흉부로 제의를 드리게 되었다고 하는 데, 제의를 드릴 때 붉은 줄로 흉부를 두르고 다시 가죽으로 둘렀다. 그리고 갈 걸럼트에 부정이 타지 않도록 사방에 향을 피우고 졸(제의용 램프)을 밝혀 놓았으며, 불 제의에 임했다. 모든 종류의 화제 뒤에는 화신에게 드렸던 음식을 모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의례를 마친다.

불 제의를 드릴 때는 정결한 곳에 자란 버드나무를 정성껏 골라 나무를 가지런히 쌓아 불을 붙이는데, 버드나무를 사용하는 것은 버드나무가 불, 연기, 신, 태양과 관계를 갖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불교가 전파되기 이전에는 크고 작은 화제(火祭)를 무당이 주관했으나, 불교가 전파된 이후는 주로 스님들이 주관하게 되었다.

화제를 드린 후 삼 일 동안은 유제품이나 곡식류를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을 금하며, 일주일 동안 불을 쇠 종류의 고챙이로 찌르거나 휘젓는 것을 금한다. 또 일주일 동안은 불의 신이 없는 때라고 보아 불을 더럽히거나 함부로 하는 것을 매우 금기시했다.

역사서나 경전에 화제를 드린 날을 ‘작은 설’이라고 한 것과 매우 흡사하다. 이렇게 동지에 화제를 드리고 그날을 ‘작은 설’로 본 것은 불 제의로 모든 부정적인 것을 소진시키고, 오는 한 해가 새롭게 타오르는 불처럼 번성하고 행운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붂유럽의 원시인들은 한 해 동안 사용하는 태양의 힘이 연말에 가면 그 힘이 다하여 기력을 상실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나무에 불을 붙여 피로에 지친 태양에 원동력을 더하여 불의 재생을 돕는 상징적 의례를 행했다. 이것은 일종의 태양제 성격을 지니는 것으로 몽골의 불 제의도 이러한 성격과 동궤의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 불에 관련된 금기 ***
앞에서 살펴본 대로 몽골에서는 고대로부터 불을 신성하고 존귀하며 가장 순수한 것으로 보았으며, 불에 신이 거하여 가정에 축북을 가져다주고 가축을 번성케 하며, 재난을 물리쳐 준다고 믿었다. 그뿐 아니라 갈 걸럼트는 가정의 중심이며 나라의 중심적인 생명력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더욱 크고 그에 따른 금기도 매우 많은 편이다.

-칼로 불을 찌르거나 불에 넣어 흔들지 않는다. 칼로 불을 찌르면 불의 신이 놀라고 갈 걸럼트에 재해가 생기게 된다고 본다. 

-불 옆에서 도끼로 장작을 패는 행위를 금한다. 이것은 화신(火神)의 평화를 해치는 일이라고 본다.
이에 대해 칭기스탄은 1189년과 1206년 대법령인 <이흐 자삭>에 “누구든 솥에서 고기를 칼로 꺼내거나, 불 옆에서 나무를 패는 행위, 옷을 강 속에 넣어 빠는 행위, 물과 재, 가축우리에서 소변을 보는 행위를 엄하게 금하며 이러한 사항을 어기면 엄한 벌로 처단을 받게 된다.”고 천명했다. 

-외부 사람이 들어와 화롯불에서 직접 담뱃불을 붙이거나, 갈 걸럼트의 왼쪽으로 돌아나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또 집에서 불을 내가 다른 사람에게 불을 주는 것을 꺼린다. 

-불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금기시한다. 불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함부로 말을 하게 되면 화재를 당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몽골 사람들은 불과 물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불과 물에 관련된 재앙이 이른다고 보아 매우 주의를 한다. 

-걸럼트의 불에 더러운 것, 지저분한 쓰레기를 태우는 것을 금한다. 불이 더럽혀져 화신이 진노해 불을 떠난다고 보기 때문이다. 

-걸럼트의 불을 향해 발길질하거나 불에 물을 붓는 행위를 금한다. 물을 부으면 불과 물의 신이 노하여 갈 걸럼트의 불을 끄거나 나쁜 일이 생길 징조라고 여긴다. 일반적으로 물과 불은 상반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만약 꼭 불을 물로 꺼야 할 급한 일이 생기면 “불의 신이시여, 당신의 발을 당기십시오.”라고 말하여 금기를 제거시킨다. 

-불이 있는 화로 위를 걷거나 밟거나 차는 행위를 금한다. 불 위를 걷거나 차면 집에 모신 부처님과 갈 걸럼트, 집의 운을 약화시키는 행위와 마찬가지라고 본다. 또 델의 깃이나 구두의 앞을 불을 향해 두지 않는다. 

-불에 비계나 술, 유제품, 고기를 올리는 것은 가능하지만, 가축의 젖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가축의 유두에 병이 생기거나 젖이 줄어든다고 한다. 또 불에 새의 깃, 양파, 마늘 껍질 등을 태우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가축이 눈병이 생기거나 눈이 먼다고 한다. 

-불에 침을 뱉거나 코를 푸는 행위를 금한다. 이것은 갈 걸럼트를 모욕하는 행위이라고 본다. 

-불이 있는 재를 뒤척이거나 뒤섞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가축 떼가 흩어지고, 정신이 산란해지며 어리석어진다고 생각한다. 

-보통 때에 불에 소금을 넣지 않는다. 당면한 재난이나 어려움 등을 쫓을 때 불에 소금을 넣고 불을 지피며, 보통 때 불에 소금을 집어넣으면 화신이 놀란다고 한다. 

-이동해 가는 집의 갈 걸럼트와 집터에 뼈나 털을 남기는 것을 금한다. 이것을 어기면 가축이 해를 입고 집안의 복이 나가며 가축우리의 상황이 나빠진다고 한다.  

-이동하는 가정은 짐을 다 실은 후 집터를 깨끗하게 청소한다. 집터 주변 환경을 다시 정돈하고, 갈 걸럼트에 밀가루를 뿌리고 , 향나무를 피워 연기가 피어오르게 하여 그 사이로 짐을 통과시키는 풍습이 있었다. 또 무쇠로 된 화로와 연통이 없었을 때 집의 갈 걸럼트에 받치는 화덕의 돌로 이동 방향을 표시하는 습속이 있었다. 이럴 때 화덕의 앞쪽 돌을 움직여 그것을 다른 돌과 떨어지게 두었다. 또 이웃 지방으로 이동할 때 화덕의 돌 가운데 하나를 가져가는 풍습이 있었다. 

-천둥 번개가 치는 날 게르 문을 닫고 화로의 굴뚝을 내려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천둥이 치고 집에 벼락이 떨어진다고 한다. 

-신이나 속옷을 화로 가까이 두어 말리지 않는다. 이것은 화신을 더럽히는 행위로 화신이 매우 노한다고 본다. 그뿐 아니라 불 위로 붉은 천 등을 돌리는 것을 금한다. 

-불 제의 시에 사용한 낙엽송이나 느릅나무 등의 나무로 게르의 천정 받침대나 벽의 기둥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런 나무를 사용하면 화재가 나기 쉽다고 한다. 

-부젓가락이나 불쏘시개를 친척이 아닌 다른 이웃에게 빌려주지 않는다. 특별히 불쏘시개를 집에서 내가거나 아이들에게 주는 것을 꺼리는 것은 청결하고 안전한 생활과 관계가 있다.

-부젓가락, 소똥을 담는 통 등은 화로와 같은 개념으로 본다. 땔감 통을 비운 채 두거나 그 위에서 다리를 늘어뜨리고 앉지 않으며, 부젓가락의 끝을 문 쪽으로 향해 두지 않는다. 

-물과 땔감을 함께 집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않는다. 왜냐하면 고인을 묻을 때에 이렇게 행하는 법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행위를 보통 때에 행하는 것을 금한다. 

-재와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이웃한 두 집 사람이 함께 가는 것을 금한다. 또 두 이웃이 재나 쓰레기를 합해 버리지 않는다. 자신의 쓰레기장을 사용하지 않으면 악귀가 일어나며 여자가 아이를 낳을 때 고생을 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재를 버릴 때 불꽃이 있는 상태에서 버리지 않는다. 재를 향해 오줌을 누는 행위를 금한다. 화신이 노여워한다고 본다. 특히 여자가 재에 오줌을 누는 행위를 금하는데, 그렇게 하면 푸른 몸을 가지거나 푸른 엉덩이를 가진 아이를 낳는다고 한다. 

-새로 태어난 여아를 불에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불에 부정이 탄다고 한다. 불기가 있는 뜨거운 재, 끓는 물을 그대로 밖에 쏟아버리지 않는다. 만약 그대로 쏟아버리면 이유 없이 많은 벌레들이 생겨나 동물과 식물을 해진다고 한다. 

-재를 버리러 갈 때 도중에 질질 흘리고 가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면 재난이 닥치고 땅이 황폐해진다고 한다. 재를 쏟고 소똥을 집에 들일 때 소똥과 남은 재가 섞이지 않도록 한다. 

-몽골인들은 어떤 계절이든 마른 땔감을 사용하는 것을 매우 존중한다. 그렇게 때문에 소똥을 미리 준비해 말려 두고, 특별히 명절이나 손님을 맞을 때 마른 장작을 풍부하게 마련해 둔다. 

-새 가정을 이룰 때 처음으로 갈 걸럼트의 불을 지필 때 친척이나 이웃집에서 불을 빌려오거나 스스로 직접 불을 지펴서는 안된다. 반드시 큰집 즉 아버지의 갈 걸럼트에서 불을 떼어가지고 와서 불을 피워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손이 끊길 수 있으며 바른 예법이 아니라고 본다. 

-시체를 묻고 온 사람은 곧바로 집에 들어가지 않는다. 집으로 들어갈 때는 반드시 두 불 사이로 지나가거나 향으로 몸을 정화시킨 다음 들어간다. 그것을 어기면 그 집에 시체의 부정이 이르고 병이나 재난이 닥친다고 생각한다. 

-부젓가락 등을 하늘 쪽 혹은 게르의 안측, 오신 손님 쪽을 향해 두지 않는다. 부젓가락에 그을음이 묻어 있기 때문에 존중해야 할 방향이나 사물 쪽을 향해 두지 않는다. 부젓가락은 벌려 두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면 그 가정에 구론이 생겨 시끄러워질 징조라 본다. 

-불로 장난을 하지 않으며, 갈 걸럼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거나 찔러 넣지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하면 화신이 진노한다고 여긴다. 

-불 제의를 드릴 때 임신한 여자가 옆에 있는 것을 금한다. 그렇게 하면 낙태할 위험이 있다고 본다. 

-예전에는 자식들이 심하게 어리광을 부리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아버지를 ‘불’로, 어머니를 ‘물’로 비유하여 아버지에게 어리광을 많이 부리면 불에 타는 것 같고, 어머니에게 어리광을 심하게 부리면 물에 가라앉는 것과 같이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새 옷을 만들어 불에 정화시켜 입는다. 특별히 어린 아이들에게 옷을 해 입힐 때 많이 행하는 습속이다. 

-가축에 낙인을 찍을 때 가축우리 가운데 불을 지피고 그 불로 낙인을 달군다. 낙인은 땅에 기대 두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땅이 낙인을 찍어 가축이 줄어들고 가난해진다고 여겼다. 

-몽골의 집집마다 차강사르 아침에는 다른 때보다 훨씬 일찍 일어나 반드시 새로운 마른 땔감으로 불을 붙이고, 솥에 가득 차를 끓인다. 그리고 태양이 솟아오르면 주위에 있는 어워에 올라가 음식과 차의 첫술로 사찰을 올리며, 장대한 산과 이 세상에 경건한 태도를 나타낸다. 그리고 부처님과 어워제를 드리는 산과 물, 가정의 갈 걸럼트에 새해 음식과 고기의 가장 좋은 부위를 올려드리는 풍습이 있다.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1.17

몽골의 신앙과 종교 - 샤머니즘(1)

 

몽골의 샤머니즘은 흉노 시대에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몽골의 샤머니즘은 일반적으로 무속이라고 하는데, 최근 들어 이를 무교라고 하는 경향이 있다. 무속은 자연 신앙을 바탕으로 생성된 것으로 고대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신앙 형태였다. 몽골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멍흐 텡게르’ (영원한 하늘: 천신)와 ‘에투겡 에흐’ (대지의 어머니: 지모신)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몽골어에서 하늘을 나타내는 ‘텡게르’라는 단어는 고대 알타이계통의 모든 언어에서 만나게 되는 ‘신격화된 하늘’을 의미한다. 


샤머니즘은 구체적인 자연신앙인 페시티븐(feticism-물신신앙)이 추상적인 하늘과 땅의 신앙으로 전이된 형태이다. 이는 사회의 발전 단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생성, 발전되었다. 몽골에서 무속이 생성되었던 시기는 대략 지금으로부터 5-7천 년 경으로, 당시 사회는 모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던 사회라고 본다. 그때의 사회 발달 단계를 살펴보면 도구의 발달과 더불어 공동체의 생산력이 점차 증가하면서, 생산 방식이 수렵채취에서 점차 도구를 이용한 사냥과 유목으로 넘어가는 사회 단계에 이르게 된다. 수렵채취의 생활 방식에서 목축생활로 전이된 시기, 석기에서 청동기, 철기를 사용하게 되던 시기, ‘수림민’ 이 ‘초원민’으로 전환되던 시기, 사회 구조로 보면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이된 시대와 어느 정도 맞물린다. 

 
사고 면에서 감각적이고 구체적인 인식에서 추상적인 사고가 더욱 발달하고, 평면적 사고에서 입체적인 사고로 전환된 것과 관련이 있다. 수렵시대 신화에서는 수평적인 세계 인식이 지배적이고 땅의 기원 (대모신)과 그의 주인인 정령신앙이 보편적이었다면, 유목 문화로 발전되면서 하늘과 대기의 상태를 무엇보다 먼저 살피는 하늘 중심의 세계관이 주를 이루게 된다. 하늘에 자신의 소원을 고하고 가호를 비는 일이 잦아졌으며, 이때부터 ‘지고한 하늘’ (수직)과 ‘드넓은 대지’ (수평)를 대응시켜 인식하려는 새로운 사고 형태가 생겨나게 되었다고 본다. 


신화론의 발전 초기에는 대지-모성 신화가 주를 이루고, 신앙적인 면에서도 대지를 제의하는 무당의 굿이 훨씬 지배적이었던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이 시대 신앙의 한 형태는 ‘무당나무’ (당나무) 신앙이다. 오드강 나무라는 당나무는 수신 또는 무당의 수호신이 깃드는 곳으로 생각했으며, 나무신앙은 초기에 지신신앙과 관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신앙 단계에서 나무신앙은 토템 형태로 발전하는데, 부랴트족들은 자신들이 자작나무, 할리막 사람들은 버드나무에서 기원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나무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죽을 때 영혼은 다시 나무로 돌아간다고 믿었다. 

 
후에 대지에 대한 신앙 및 대지 중심의 제의에서 하늘 신앙과 제의가 보다 큰 위치를 차지함과 동시에 무당이 아닌 박수의 역할이 더욱 두드러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에 이르면 남성의 생산력이 강화됨으로써 공동체의 중심적인 힘이 여성에서 남성으로 전이되고, 잉여 생산이 생기면서 재산의 상속 문제가 대두되는 사회가 된다. 이러한 과정이 전개되면서 남성 가계를 중심으로 하는 부계제 사회로 접어들며, 무속은 하늘을 숭배하고 신앙하는 남성 위주의 무속으로 발전한다. 즉, 초기 지신 신앙 중심의 무속에서 천신 신앙 중심의 무속으로 전환되면서, 부족 연합체 내지 국가 개념의 공동체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이렇게 샤머니즘의 초기 단계는 여무(女巫)인 오드강의 대지신앙이 우세했다면, 다음 단계의 샤머니즘은 남무(男巫-박수)인 재랑의 하늘신앙이 강조되게 된다. 오드강은 ‘이두겡’ 즉 여신성, 여성 기원에 관련된 단어이며 지(대)모신을 나타내는 에투겡도 어원을 같이하는데, 학자들은 이는 모두 모계제와 관계된다고 보았다. ‘재랑’은 천신과 의사소통을 하는 자, 천신의 명령을 전하는 자로 몽골어 ‘가리키다, 가르치다’를 의미하는 ‘자아흐’에서 왔다고 본다. 또 한국의 고대국인 신라 남해왕을 ‘차차웅’이라 불렀는데, 한국학자인 베. 소미아바타르는 이 단어가 “현자”를 나타내는 몽골어 ‘체쳉’에서 왔을 거라는 견해를 제시했다. 


투르크어 계통에서 남자 무당을 “박사”라고 하는데, 이 박사라는 단어에서 몽골어의 ‘선생’을 나타내는 ‘박쉬’가 생겨났다고 본다. 이 ‘박사’나 ‘박쉬’가 우리나라에서 남무를 지칭하는 ‘박수’라는 단어와 유사하여 흥미를 끈다. 


부랴트의 동양학 연구자인 게.체.츠비커브는 <동양의 부랴트 몽골인들의 불신앙>이라는 기록에서 최초의 제의자들은 불을 지키고 불을 제의하는 의무를 지닌 여성들이었다는 견해를 제시했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오드강’(무당)이라는 단어는 고대 투르크어의 ‘오트’ (불)이며, 여기에 여성을 의미하는 단어를 생성시킬 때 사용하는 접사 ‘강’이 붙여진 형태라고 보았다. 즉, ‘오드강’(무당)이란 최초의 신앙의 주재자인 불의 오드강 즉 ‘불을 제의하는 자’를 의미한다고 했다. 


벽화에 그려져 있는 여성들의 형상과 돌이나 뼈, 코끼리의 어금니로 만들어진 여성 조형물 등 원시공동체 시대의 이러한 형상들은 무당을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으며, 이것은 후에 엉거드(무당의 몸주신)가 되었다고 학자들은 본다. 

몽골 샤머니즘을 무교라고 명명한 푸레브가 제시한 무교의 발전 단계를 언급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무교의 생성기 : 및 정치적인 정책과 활동이 무교적 견지에서 이루어졌다. 


흉노국에서는 무교를 정치 생활의 지배원리로 삼았으며, 왕인 선우만을 ‘천자’ (天子)라고 했다. 역사서에 “흉노인들은 해마다 조상과 천신제, 산천제를 지냈다.”, “왕은 아침마다 궁에서 나와 솟아오르는 태양에, 밤에는 달에 절했다.”고 언급하고 있어 궁에서 무속의 습속이 일상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지금부터 5-7천 년 전의 시대. 즉 모계제 사회로부터 몽골에 처음 국가가 형성된 기원전 3세기까지의 시기. 


이 당시의 부족 지도자는 초능력을 소유한 무당들이었다. 그들은 탁월한 재능을 소유한 자들로 부족을 통괄하는 지도자였으며, 질병을 치료하는 치료 의술사였다. 


2.
무교의 발전기 즉 흉노국의 무교 시기 : 이때는 흉노국이 강성하게 발전하고 있던 기원전 3-1세기의 시기를 포함한다. 이 시대는 몽골 무교의 세계관이 모두 형성된 시기였기 때문에 내외국의 상호 관계 및 정치적인 정책과 활동이 무교적 견지에서 이루어졌다. 


흉노국에서는 무교를 정치 생활의 지배원리로 삼았으며, 왕인 선우만을 ‘천자’ (天子)라고 했다.

역사서에 “흉노인들은 해마다 조상과 천신제, 산천제를 지냈다.”, “왕은 아침마다 궁에서 나와 솟아오르는 태양에, 밤에는 달에 절했다.”고 언급하고 있어 궁에서 무속의 습속이 일상화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1.19

몽골의 신앙과 종교 - 샤머니즘(2) 
 

‘영원히 푸른하늘’을 신봉했던 칭기스칸

3. 몽골의 많은 종교 사상이 혼합되어 영향을 주고받던 시기 : 이 시기는 흉노가 지배했던 지역에서 황금 불상이 발견된 기원전 2세기부터 몽골의 무교가 다른 종교 사상이 서로 공존하며, 섞이고 습합되는 과정이 계속되었던 13세기까지를 이른다.

몽골 땅에서 살던 부족국가들은 대부분 무속을 신봉했으며 무속이 사회, 문화 전반을 지배했다. 선비, 유연, 거란 등 위구르, 투르크, 몽골족 들은 모두 무속을 신봉했다. 수림민이었던 오량해 사람들과 바르가 사람들 가운데는 다른 부족보다 더 많은 무당들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북쪽 수림민 가운데 무속이 우세했는데, 이것은 수림민과 무속 간에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선비의 태조 왕은 40군데 제의소에서 제의를 드렸으며, 그때 상당히 많은 무당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유연국은 정치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만 무속 역시 정치, 사회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쳤다. 왕은 중추에 큰 호수에 천막을 세우고 일주일 동안 고기를 먹지 않고 근신하며 천신제를 지냈다고 한다. 고기를 먹지 않는 계율은 무속적인 것이 아니라 불교적인 것으로 이때에는 이미 무속에 불교적인 영향이 습합되고 있었음을 시사해준다. 유연에서는 무속이 전 시대처럼 정치의 중심지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옹족이나 귀족들의 생활에 여전히 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으며, 민중의 대다수는 무속을 신봉했다. 그러나 이시대에는 지배자 계급의 권익에 반하는 무당들은 처치하여 무속의 독점적인 지배력이 많이 약화된다.

<원사>에 보면 몽골 사람들은 조상께 큰 제사를 드릴 때 가축을 죽이고, 마유주와 가축의 젖을 뿌려 올리고 무당들에게 굿을 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몽골제국 시절부터 무당의 개별적인 제의소를 갖게 된다. 테무진에게 ‘칭기스’ 라는 칭호를 준 것도 무속과 관계가 있다. 무가에 ‘하찌르 칭기스 텡게르’라고 나오는 것을 보면 칭기스라는 명칭이 무속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확실히 말해준다.
 
칭기스칸은 스스로는 ‘영원히 푸른 하늘’을 숭배하는 무교도였으며 무교의 힘을 빌어 대권을 얻고 나라를 통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칸이 될 것을 예언한 허허추를 옆에 두고 항상 국정에 자문을 구했을 뿐 아니라, 전쟁을 하기 전에 반드시 높은 산에 올라가 천신께 제의를 드리고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했다.  
 
그러나 칭기스칸은 1,000년 이상 지속되어온 제정일치 사회를 마감하고 정치를 종교에서 분리시켰으며, 국정에 무교와 불교의 이원화된 견해를 수용함으로써 점차 정치가 분열하느 원인을 제공했다. 칭기스칸을 결정적으로 도왔던 멩릭의 아들 허허추 테브 텡게르는 형제를 대결하는 양상을 빚기도 했다. 테브 텡게르는 스스로 자신을 ‘신의 화신’ 이라 불렀으며 점점 오만해져 결국 칭기스칸의 아들 어트치기헹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러한 무속의 폐해에도 불고하고 무속은 여전히 정치 사회에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몽골 비사] 272절에는 13세기 몽골에 무속의 힘이 대단히 컸음을 보여주는 가사가 나온다. 1231년 어거대칸이 중국 원정에서 입과 혀가 마비되는 중병에 걸렸을 때 많은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게 하고 제물을 바쳤으나 병이 낫지 않자, 무당의 말대로 칭기스칸의 막내아들이자 자신의 동생 톨로이를 희생시키는 사건이 벌어진다. 톨로이는 무당에 의해 죽게 되었을 때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 시대 박수, 무당들은 몽골의 왕과 귀족들의 권익에 직접적으로 봉사했으며, 한편 자신의 권위를 직간접적으로 행사함으로써 계급사회에 음양으로 영향력을 미쳤다. 또 그들은 민중들을 미혹에 빠지게 했고 하층민들을 착취하는 일을 돕기도 했다.

그러나 쿠빌라이칸 시대부터는 무당들 대신 국사에 승려를 앉힘으로써 무교는 통치의 기반에서 물러나게 된다. 불교는 무교의 의례를 불교화 했으며, 이러한 불교적 영향 밑에 들어간 무당을 ‘샤링 버어’ 즉 황 무당이라 한다. 원나라 시대에 비록 불교가 국교로 자리잡고 정치적인 주된 역할을 수행했으나 일반 민중들의 대다수는 무속에 의지해 살았다. 쿠빌라이칸과 원나라의 칸들은 불교를 존중하고 전파시키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그들 역시 무속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며 생활 속에서 여전히 무속의 지배를 받았다.

<원사>에는 몽골 칸들은 몸소 참여했던 제의에 관해 기록되어 있다. 몽골의 칸들은 해마다 6월 24일에 샨도 시에서 대제(大祭)를 지내거나 계절마다 태묘에 제의를 드릴 때 많은 무당들을 불러모아 굿을 했다고 한다. 또 왕이나 귀족들은 시체를 묻은 뒤 49일째에 묘에 가서 제의를 드릴 때 무당과 박수에게 굿을 하게 했다고 한다. 원나라 시대부터 불교의 영향이 매우 커져, 승려들이 무당보다 정치적으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무속과 불교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첨예화된다.

칭기스칸 시절에 불교와 도교와 투쟁하여 무당들은 지키고 보호했던 사람 중 고능올랑바타르에 관한 전설이 바르가, 오량해, 다르하드 무당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13-14세기 무속은 몽골인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많은 이들이 불교와 도교가 몽골에 전파되는 것을 반대하고 저항했다.

한편 13-14세기 몽골에 불교가 강하게 전파됨으로써 무속 의례에 새로운 것들이 생겨났으며, 무복과 무구는 예전의 것과 비교해 상당히 개량되고 복잡해졌다. 윗시대에는 무당들은 자신의 몸주신의 형상을 돌이나 나무로 만들었다면 제국 시대에는 은이나 쇠로 자신의 신(엉거드)를 만드는 무당도 생기게 되었다.

4. 몽골 무교의 쇠퇴기, 분열의 시기 : 13세기 이후 서서히 쇠퇴의 길을 걷던 무교는 16세 기 말에 오면 황교의 강한 침투로 말미암아 탄압을 받으면서 급격히 쇠퇴의 길을 겪게 된다.

이렇게 하여 국가의 공적인 종교 의례는 대부분 불교가 대신하게 되었으며, 무교의 자리는 사회와 매우 멀리 떨어져 일부 지역에 남아 있게 된다. 예를 들면, 헙스걸 호수의 서쪽 다르하드와 차아탕, 동쪽의 허트고이드, 할하, 더르너드 아이막 올쯔 강 유역의 부랴트 사람들, 헨티 아이막의 일부 솜의 부랴트 사람들, 바양울기 아이막의 오량해 사람들 사이에 남아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정치권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에 위치한 지역의 사람들이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1.21


몽골의 신앙과 종교 - 샤머니즘(3) 
  
몽골 무속의 이해  

몽골의 무속에서 세상은 천상계, 지상계, 지하계라는 삼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본다. 

몽골의 흑무당들은 세상의 기원에 관해 이야기할 때, 아주 오랜 옛날 세상은 작은 덩어리 상태였다가 천지개벽이 일어나 남성 기원의 하늘과 여성 기원의 땅이 생겨났다고 본다.

몽골의 천신(영원히 푸른 하늘), 지신은 음양 사상의 근간 속에서 형성되었으며, 아버지 99 천신과 어머니 77 지신은 쌍으로 숭배되었다. 천신은 서쪽의 55신(흰 방향)과 동쪽의 44신(검은 방향)이 있다고 한다. 

서쪽은 현대의 남쪽, 동쪽은 현대의 북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서쪽(남)의 55신 중 50신에게는 비손을 하고, 5신에게는 제의를 드리며, 마찬가지로 동쪽(북)의 44신 중 40신은 비손을 하고, 4신에게는 제의를 드려 신앙한다. 서쪽인 백색 방향의 55신은 온순하며 선한 일을 가호하고, 인간 존재를 지키며 삶의 방향을 지시하고 이끄는 신성들이며, 이들 신들을 모시는 무당을 ‘백무당’이라 한다. 이에 반해 동쪽은 검은 방향의 44신은 위험하고 악한 모든 것에서 인류를 구원하고 보호하며, 적을 눌러 멸망시키는 사납고 무서운 신들로, 이들 신을 모시는 무당을 흑색 방향의 무당 즉, ‘흑무당’이라고 한다.

이 99신의 양쪽 55, 44신의 중심 신은 9신으로, 이 모든 신들은 남성신이며 아내와 자식을 거느린다. 

이렇게 두 가지 방향의 신들이 존재한다고 관념하는 것은 세상의 모든 것에는 빛과 어둠이 있다는 음양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내와 자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천신들의 세계는 인간 세계와 대칭을 이루고 있다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 기인한 것이다.

몽골 무속에 황교의 영향이 강해지면서, 불교와 혼재된 성격을 가진 황무당(황교의 영향을 받았다 해서 붙여진 명칭)이 생겨나게 되었다. 

불교가 지배적인 힘을 행사하던 시기에는 무속을 ‘검은 종교’라 했으며, 이때 사용된 ‘검다’는 수식어는 ‘강하고 거친 영적 힘’의 원래 의미와는 달리 무속을 매우 비하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 몽골 무속의 세계관을 간단히 언급하면 다음과 같다.

1. 세계는 처음 하나로 존재하다가 세상이 개벽하여 아버지 하늘과 어머니 땅으로 나누어졌다. 그 가운데 가족과 생활이 생겨났다. 

2. 이 세계는 천상, 지상, 지하의 세 개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3. 세계는 일반적으로 태양이 비추는 세계, 어두운 공간이라는 두 개의 공간으로 구별할 수 있다. 태양이 비추는 이 세상은 위에 언급한 3개의 세계를 말하며, 이 세계는 함께 어우러져 있다.

4. 사람들이 죽은 후 내세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이 세상에서 삶을 마치면 영혼은 어두운 공간에 존재하게 된다. 그 영혼이 영원한 삶의 순환이 시작되어 어머니의 배에 스스로 빛을 비추며 옮겨간다고 본다. 
<알랑고아의 배에 들어온 빛과 같은 것-늑대 토템>

5. 인간의 혼은 3가지로 이루어진다. 두 가지는 사람이 죽으면 사라지는 혼이요, 하나는 영원히 죽지 않는 혼이다. 

세 가지 영혼의 하나는 어머니 쪽에서 얻는 육신*피의 혼, 다른 하나는 아버지 쪽에서 얻는 뼈의 혼,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하늘 혼 또는 혼령이다. 사람이 죽으면 육신과 피는 3년이 되면 완전히 소멸한다. 뼈의 혼은 인간의 장골에 깃들여 있으며, 이 뼈 역시 사람이 죽어 일정기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가축의 장골을 발라먹고 반드시 흠을 내어 버리는 풍속이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죽은 혼이 깃들어 인간 주변을 맴돈다고 본다. 


또 길을 가다 사람의 장골을 마주치게 되면 말발굽으로 밟게 하여 흠을 내어 혼을 제거하며, 여럿이서 함게 가다 장골을 마주치면 양쪽으로 갈라서 지나가지 않고 한쪽으로 지나간다. 그래야 장골에 깃든 혼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한다. 무당이 죽으면 일정한 곳에 흰 펠트로 싼 시신을 3년 동안 풍장을 한 후 불에 태운다. 이것은 육신과 뼈의 혼이 완전히 사라지고 혼령이 산천신으로부터 벗어나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피, 뼈의 혼은 사라지지만 하늘 혼(혼령)은 사라지지 않고 위로 올라간다고 본다. 이것은 한국의 혼백에 대한 관념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늘 혼은 한국의 혼(魂)에, 육신*피의 혼, 뼈의 혼은 백(魄)에 해당한다. 
  
독수리가 된 무당 이야기 

아주 오랜 옛날에 독수리는 사람이었다. 한 젊고 아름다운 무당이 독수리로 변해 서쪽 경계까지 날아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예 모습대로 사람이 되곤 했다. 그 다음에 그는 다시 독수리로 변하여 동쪽 경계까지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꽤 오래 머물러 있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몹시 배가 고파, 죽은 동물의 시체 위에 앉아 고기 찌꺼기를 쪼아 먹었다. 


그는 동물의 시체로 배를 채우고는 집 쪽으로 날아갔다. 이렇게 부정한 시체를 먹었기 때문에 그는 집에 돌아와서 사람의 모습으로 변하지 못하고 그대로 독수리가 되어 버렸다. 부랴트 사람들은 독수리를 수호신으로 신앙하기 때문에 독수리를 매우 존숭하며 활을 쏘아 함부로 사냥하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두 마리의 독수리 가운데 한 마리를 죽였다면 남겨진 독수리는 밤새도록 어리흥 섬(바이칼 호수에 있는 섬)을 향해 날아가, 거기서 그와 같은 독수리를 발견하여 짝을 얻는다고 한다. 그 다음날 보면 정말로 두 마리 독수리가 짝이 되어 날아간다고 한다. - 체렌 서드넘 <몽골의 신화> 중에서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2.1


몽골의 신앙과 종교 - 샤머니즘(4) 
  
무속의 습속 

일반적으로 몽골의 무당은 강신무를 말하며 보통 12-25세에 무당이 된다. 세습적으로 무당이 되든 그렇지 않든 무당이 될 사람은 일정 기간 무병을 앓는다. 몽골의 흑무당들은 무당이 되겠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무속에서 말하는 ‘어두운 공간’으로 데리고 가 길을 가르쳐주는 의례를 행한다. 이 의례는 3단계로 이루어진다. 

첫 번째, 무복과 무구를 만들어 신어미가 그것을 입고 사용하면서 옆에 있는 제자를 인도하여 제자의 집에서 일주일 동안 굿을 한다. 이 일주일 안에 제자의 신체와 마음에 변화가 생기면 그 즉시 신어머니는 무복을 입히고 굿을 하게 하며, ‘어두운 공간’으로 여행하는 길을 이미 찾았다고 본다. 만약 일주일 안에 제자에게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으며 무당이 될 수 없는 사람이라고 간주한다.

두 번째, 제자의 몸과 마음에 변화가 생기면 다시 두 번째 단계의 의례를 행한다. 신어머니는 제자를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의례를 행한다. 제자는 신어머니에게서 오른쪽 만찍(술장식)을 받는다. 14일 동안 제자는 혼자 밖에 나가서는 안 된다.

세 번째, 강신이 되어 굿을 할 수 있으면 무당이 되었다고 보지만 처음 3년 동안은 다른 무당을 가르칠 수 없으며, 신께 바치는 세테르(가축 제물)을 드리는 의례를 주관하지 못하며, 사람들에게 치료 행위를 하지 못한다. 3년 동안 사부는 제자의 엉거드, 제자는 사부의 엉거드에게 제의를 드리며, 제자는 사부의 가르침에 따라 흑무당의 여러 의례와 규칙들을 배운다. 이러는 동안 제자는 스스로 자신의 엉거드를 모시기 시작한다. 

무속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엉거드(몸주신)이다. 엉거드는 자신이 가호하는 모든 것들을 위험에서 구원하고 지키는 수호신이다. 무당은 엉거드의 말을 사람들에게 전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말을 엉거드에게 전하기도 하는 통역자로서의 역할을 한다. 

무당, 박수들을 모두 자신의 집에 엉거드의 형상을 펠트나 쇠, 은으로 만들어 모셔놓고 제의를 드린다. 몽골의 가정들에서도 무당이나 박수를 모셔 굿을 할 때 엉거드의 형상을 만들며, 사용했던 엉거드의 형상들은 버리지 않고 간직해 제의를 드리는 풍습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가정에서는 이동을 할 때 몇 수레의 엉거드 형상을 싣고 간다. 가계에서 얼마나 많이 무당을 모셨는가에 따라 많은 엉거드를 보관하게 된다. 

무당들이 굿을 할 때 특수한 복장을 한다. 부족마다 무복은 차이가 있지만 일반적으로 여러 종류의 천을 붙인 긴 델, 독수리 발톱이나 사슴뿔의 형상을 가진 쇠 모자나 특수한 형태의 쓰개를 쓰고, 독특한 모양의 구두를 신는다. 

무복은 무당에게 들어온 엉거드의 몸이라고 본다. 즉 인간이나 노루, 영양, 염소 등의 동물 혼이 변화된 것이라고 본다. 고대와 중세기 때에는 무복을 노루, 영양, 염소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무복의 뒤쪽에는 무당을 수호하는 뱀 상징의 88개 줄을 꼬아 아래로 늘어뜨린다. 또 뒤쪽으로는 머르걸이라고 하는 세 개의 술을 늘어뜨리고 하득을 묶는다. 허리에는 십이 동물이나 용의 형상을 새긴 아홉 개의 쇠거울을 단다. 주로 옛날에 전승되어 온 청동 거울에는 12해 동물이나 용의 형상들을 그려 넣었다. 거울은 여러 가지 저주 혹은 엉거드의 공격으로부터 무당을 보호해 주며, 무당이 점을 칠 때 무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무당이 쓰는 신모(紳帽)는 엉거드의 머리라고 보며, 대부분의 지역에서 ‘어르거이’라고 부른다. 몽골의 흑무당은 머리 둘레를 사각형의 띠를 두르고 위쪽이 막히지 않는 것을 쓴다면, 황무당은 머리를 덮는 형태의 신모를 쓴다. 쓰개는 지역마다 차이가 있는데, 서부 몽골의 무당들은 높이가 낮지 않는 것을 사용하며, 어떤 무당은 수건으로 머리를 두른다. 반면, 할하 무당들의 모자는 상당히 장대한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높이가 높다. 

고대 흑무당의 쓰개의 앞쪽에는 부엉이 형상을 만들었다면 20세기에는 사람 얼굴 형상을 묘사했다. 부엉이 형상은 고대 토템(조상신)을 반영한 것이며, 인간 형상은 칭기스칸 시대 무속을 지키기 위해 불교에 저항했던 인물인 고능올란바타르의 형상이라고 신화적으로 말한다. 흉노시대에는 쓰개의 위쪽을 부엉이 털로 돌아가며 장식했는데, 20세기에는 부엉이, 독수리, 흑뇌조의 깃털로 장식했다. 또 쓰개의 양쪽 귀에는 각각 3개씩의 쇠붙이가 달려 있다.

무당이 굿을 할 때 헹게륵(북)을 사용한다. 무당의 헹게륵은 아홉 개의 각면이 있으며 한쪽을 가죽으로 씌운다. 헹게륵은 9면의 둥근 형태, 세모 형태의 것이 있다. 박수는 수노루의 가죽으로, 무당은 암사슴의 가죽으로 헹게륵을 씌우며, 북면에는 사슴 모양을 그려 넣었다. 헹게륵은 몸주신 혹은 무당의 이계 여행 시의 탈 것, 사람들의 소원을 신께 전하고 신의 말씀을 받아오는 도구, 오신(娛神)의 도구, 무당과 신의 의사 소통을 돕는 도구의 역할을 한다. 헹게륵을 다르하드 무당들은 ‘헹게륵’, ‘아잉 사아랄’이라 하고 부랴트 무당들은 ‘헤츠’, 오량해 무당들은 ‘둔게르’라고 부른다. 무당은 굿을 할 때 먼저 무복을 입고 쑥을 태워 연기를 내어 헹게륵을 쐬게 하는데, 이것을 북을 살린다고 한다.

바르가 부랴트 부족의 무속에서는 사슴으로 수호신에게 제의를 드리는 것 외에 동물의 내장을 걸어 제의를 드렸던 풍습이 있었다. 즉, 무당의 집 뒤에 동쪽으로 낙엽송, 서쪽으로 자작나무를 세우고, 그 두 나무를 줄로 연결하여 거기에 죽인 동물의 심장, 식도, 허파, 간 등을 걸었으며, 이 두 나무의 앞쪽에 두 그루의 작은 나무를 세워 죽인 동물의 내장을 걸고, 피로 나무를 칠했다. 집의 오른편 나무에는 달을, 왼편으로는 태양을 만들어 걸어 자신의 몸주신을 제의하는 풍습이 있었다. [몽골 비사]에도 나무에 동물의 심장 또는 내장을 걸고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나오는데, 이러한 제의를 주겔리라 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2.9

 

몽골의 신앙과 종교 - 어워 
  
산이나 물에 대한 자연 신앙의 한 형태에 어워 신앙이 있다. 어워란 일종의 돌무지를 말하며, 지금까지 한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를 한국의 서낭당과 유사한 신앙적 대상물로 해석해 왔다. 

어워의 기원은 원시인들이 자연의 힘에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던 때에 여러 가지 자연재해를 당하거나 질병 등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을 때 주변 지역의 산천신이 분노하여 재앙을 내린 것으로 생각하여, 신을 위무하기 위해 생겨났다고 본다. 즉, 산과 물의 주인(신)이 깃드는 곳을 시각적으로 가시화한 표시로, 자연신앙의 신격이 의인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종교적 상징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인 지신 신앙은 산천신 숭배로 그 이전 자연 신앙이 좀더 인간화, 추상화된 형태로 이어졌는데, 이것은 어워라는 종교적 신앙물로 구체화된다. 이와 같이 어워는 산의 형상을 세계 축으로 하고, 때로 나무(주로 버드나무)를 세워 천신이 내리는 강림처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몽골 사람들은 어워와 수호신, 천신을 하나로 관념한다. 

어워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그 기원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으며, 역사적으로 보면 13세기 자료에 나타나지만, 이것은 신앙의 발전단계로 보아 훨씬 이전 시대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몽골의 어워는 최소한 샤머니즘의 초기 단계 즈음에는 존재했을 것으로 보인다. 즉, 어워는 지신 신앙의 종교적 상징물로 세워졌다가, 그 다음 단계의 천신 신앙을 흡수한 종교적 대상물이라 할 수 있다. 어떤 학자는 모계제 사회가 부계사회로 바뀌어 가는 전환기에 생겨났다고 본다. 

고대인들은 불을 돌 속에 간수했으며 이러한 화덕의 돌과 돌무지인 어워가 모종의 관련을 지녔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또 무속이 지배하던 고대 몽골에서는 어워에 무당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무당의 영혼을 부르며 굿을 하는 어워제가 있었다고 한다. 

학자들은 13세기 자료로 [몽골 비사] 등에 나오는 ‘고아 더브’ (언덕), ‘언더르 더브’, ‘후레 더브’ 등이 고대 무속의 중심지였으며, 이곳은 어워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고 보았다.

어워는 무속 에너지의 지고의 거점이며 하늘과 가장 가까이 있는 곳으로 불교적으로 이해로 보면 절과 같은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어워는 몽골의 성산이면 어느 곳이나 있으며, 이 어워를 중심으로 산신제가 거행되었다. 인간 생활의 고통을 주는 가뭄이나 자연재해, 질병이나 어려움이 생길 때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어워제를 드렸다.

어워는 유목 생활과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 몽골 사람들은 충분한 초지를 제공하는 대지와 그 초지를 가능하게 하는 태양, 비 등을 내려 주는 하늘에 대한 무한한 감사와 경외의 마음을 드러내고, 앞날의 삶을 가호하고 축북을 내려 줄 것을 기원하며 어워를 세웠다. 또한 먼 길을 떠날 때 높은 산이나 고개 위에 어워를 세워 방향을 가늠하는 방향자가 되게 했으며, 어워는 초원의 험한 여행길에서 여행객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기도 했다. 전쟁을 떠날 때에도 어워에 제의를 드림으로써 하늘에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했다. 

현재 몽골에서 어워제를 드리는 곳은 800여 곳에 이르며, 신성이 거하여 제의를 드리는 어워는 420여 개가 된다.

어워는 큰 산이나, 언덕, 고개 위나 강, 호수, 샘물 옆에 또 초원 등에 만들어지며, 몽골의 어느 지역을 가든 쉽게 볼 수 있다. 

어워는 돌로만 되어 있는 것, 돌 위에 나무를 세워 놓은 형태, 타이가 지역의 나무 어워, 돌이 거의 없는 곳에서는 흙으로 된 것 등 다양한 형태가 있다. 이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것은 돌을 쌓고 맨 위에 기나 하득을 묶은 버드나무나 나뭇가지 등을 꽂아 놓은 형태이다. 몽골의 할하 사람들은 버드나무를 숭상하며 이 나무를 ‘몽골 나무’라고 부른다. 이렇게 버드나무에 하득이나 천 또는 종이를 묶어 장식한 것을 잘마라고 한다. 

몽골의 흑무당들이 저주 등을 행할 때 어린 전나무나 낙엽송, 검은 하르간 등을 검은 천으로 장식했는데, 이것을 ‘잘마’라고 했다. 이렇게 행한 저주에 대응할 때, 어린 낙엽송이나 검은 하르간 등의 나무를 검은색으로 장식하고, 자작나무, 버드나무, 잣나무 등을 흰 천으로 장식했다. 그리고 검은 것으로는 저주가 이른 쪽을 향해 불에 태우고, 흰 것으로 장식한 나무는 무당 자신의 집 화로에 모셔와 태웠다고 한다.  

어워의 종류로는 알탕 어워, 길 어워(고개 어워), 샘 어워, 약수 어워(성수), 초원 어워, 기념 어워, 경계 어워 등이 있다. 어워의 성격으로 보면 크게 하늘 어워, 인간 어워, 대지 어워의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헹티 아이막의 보르항 할동 산의 오른쪽 정상에 있는 큰 어워를 ‘하늘의 어워’라고 부르는데, 이 어워에는 칭기스칸 가문의 무당들이 제의를 드리며 승려나 여자들은 올라갈 수 없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2.18

 

몽골의 신앙과 종교 - 어워(2) 
  


알탕 어워는 장대하고 위엄있는 산 즉 버그드 산, 하이르항 산에 세우는 어워를 말하며, 이 어워는 해마다 정해진 날짜에 제의를 드린다. 이 어워가 있는 산은 매우 신성시하며, 그 주변에서는 행동을 매우 조심해야 한다. 즉 나무나 풀을 손상시키는 행위, 땅을 파고 구멍을 내는 행위, 사냥뿐 아니라 야수나 새를 놀라게 하는 행위, 주변을 더럽히는 행위 등을 금한다. 이를 어기면 산신을 노하게 하여 재앙과 재난을 만나게 된다고 생각한다.
길(고개) 어워는 고개의 꼭대기, 숲 가운데 바위가 많은 험한 길 옆에 세운 어워를 말한다. 해마다 행하는 큰 제의는 없지만 어워 옆을 지나는 사람은 모두 반드시 말에서 내려 돌을 올리고 사찰을 드리며 길의 안전을 기원한다. 돌을 올리는 실제적인 이유 중 하나는 사람이나 가축이 가는데 방해가 되는 돌을 치우는 데 있다. 샘 어워는 강과 샘의 원천 또는 샘 옆에 세운 어워이다. 샘은 가축에게 마실 물을 제공하는 곳으로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으로 어워를 세운다. 샘 어워에 젖으로 사찰을 드리지만 젖이 든 통 등을 샘이나 강물에 넣는 행위를 금한다. 기름 등 여러 가지 더러운 것이 물에 들어가지 않도록 한다. 특히 샘에서 물을 길을 때는 매우 주의한다. 만약 샘이나 강물에 더러운 것이 닿으면, 수신의 노여움을 사 인간과 가축에 전염병이 퍼지거나 샘물이 마르게 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목자들은 물을 매우 소중히 생각하여 옷을 빨 때도 물을 떠서 적당한 거리에서 빨며 꾸정물을 강에 쏟지 않는다. 강 가까이에서 소변이나 대변을 보는 것도 금했다.
약수(성수) 어워는 약수 가까이에 있는 높고 위용 있는 산의 정상에 세운 어워를 말한다. 몽골 사람들은 성수에 들어가 몸을 치료할 때 가장 먼저 성수 어워에 가서 가지고 있는 유제품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사찰을 드리고 병이 낫기를 소원한다. 적당한 기간이 지나 몸의 상태가 호전되어 떠날 때 다시 어워에 올라가 돌을 더하고 사찰을 드려 감사를 표한 후, 병의 징후를 나타내는 사물 가운데 하나를 두고 간다. 다리가 좋지 않아 목발을 짚고 다녔던 사람들은 다리가 나으면 목발을 올려놓고 가기 때문에 약수 어워뿐 아니라 어떤 어워에서나 목발을 흔히 볼 수 있다.
초원 어워는 광대한 초원 가운데 세운 어워로 이것은 주로 어두운 저녁 시간에 목자(牧者)가 가축이 간 곳을 찾아갈 때, 장소의 대략과 방향을 가늠할 때 도움을 주는 표식으로 삼는 어워이다. 그밖에 기념 어워는 특별한 모임이 있었던 장소나 어떤 왕, 귀족이 머문 곳, 영웅의 위업을 기념할 목적으로 세운 어워이다. 때로는 왕이나 귀족의 자녀가 태어났을 때, 부족의 지도자 등을 기념하기 위해 세우는 경우도 있었다.
경계 어워는 부족 간의 경계를 삼는 어워로 상호 부족 간에 대화를 통해 정한 경계선을 따라 적당한 곳에 세운 어워이다. 이 어워는 부족이나 그 소속원이 해마다 정기적으로 제의를 드리는 풍습이 있다. 헙드 아이막의 하로올이라는 어워는 그 높이가 6-7m에 이른다고 한다. 하로올 어워는 지역의 경계를 나태낼 뿐만 아니라 지방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어워의 제의로는 국가적인 규모 또는 부족이나 가족 등의 단위로 치루는 제의가 있으나 제의에는 일반적으로 여자들은 참여할 수 없다. 예전에는 제의를 반드시 무당이 주관했으며 여수신인 경우는 남자 무당이, 남수신인 경우 여자 무당들이 제의를 드렸다고 한다. 무당들은 제의를 드릴 때 산천신을 불러 모시며 어워를 9번 돌고 9번 무릎을 꿇어 신께 말씀을 고하고 제물을 뿌려 올렸다. 이러한 무당 중심의 어워제를 지금은 불교의 승려가 주관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무속의 의례를 불교가 흡수한 한 예라 할 수 있다. 어워제가 끝나면 대개 신을 즐겁게 하고, 인간이 신과 함께 동락(同樂)하는 의미의 나담 행사가 열린다.
부족 단위의 제의가 있는 어워에는 다른 이웃 부족이 와서 제의를 드릴 수 없으며, 이 때 말이나 양 등을 신에게 제물로 드린다. 이것을 ‘세테르’하고 하는데, 제물을 죽여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목에 리본을 묶여 산 채로 드린다. 이것은 다분히 불교의 영향을 받은 의레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신성하게 구별된 말은 사람이 타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으며 거래를 한다거나 죽이는 법이 없다.
어워를 세울 때는 장소를 주의해 선택한 다음 어워를 세울 장소의 중앙을 깊이 파서 앞서 준비해온 범버(주전자의 일종)에 금, 은, 산호, 진주, 구리, 터키석 등의 아홉 가지 귀금속과 오곡의 종자 등을 함께 넣어 범버의 입구를 밀봉하여 묻고 땅을 평평하게 고른다. 곡식을 넣는 것은 부족민들이 곡식처럼 번성하고 풍부하게 살아갈 것을 상징하는 뜻을 지닌다.
이렇게 한 다음 위에 돌을 둘러가면서 어워를 만든다. 어워의 한 가운데에는 하득으로 장식한 나무를 꽂아 둔다. 일반적으로 나무를 꽂아 세울 때는 주로 버드나무를 사용하며 지역에 따라 낙엽송을 쓰기도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경전을 쓴 천 등을 묶기도 한다. 또 말의 갈기털을 묶어 놓기도 한다. 어떤 지역에서는 양이나 염소 새끼의 귀를 묶어 놓은 곳도 있다고 한다. 
알탕 어워는 보통 13개의 어워를 세우는데, 중심의 큰 어워와 동서쪽으로 6개씩 혹은 사방으로 3개씩의 어워를 세운다. 그 밖의 어워에도 중심 어워의 주변에 작은 어워들을 같이 세운 어워들이 많이 있다. 주변의 어워를 지역에 따라 ‘샤비 어워’(제자 어워), ‘젤 어워’(줄 어워). ‘솜망 어워’(화살 어워)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어워가 있은 곳을 ‘덕슁 가자르’(지신이나 수신이 머물고 다니는 곳이므로 인간이 함부로 행동을 하면 신이 노여워하기 쉬운 곳으로 매우 조심하고 근신해야 하는 장소를 이른다.)라고 하여 그 주변을 더럽히는 행위를 일체 금한다. 또한 그 장소의 지명이나 어워의 이름을 어워 가까이에서 말하지 않는다. 대소변을 보는 행위는 더욱더 금한다.
알탕 어워인 경우는 여자는 참여하지 못하며 산 밑에서 어워를 바라보며 절을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일반 어워는 남녀노소 제한 없이 어워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말에서 내려 돌을 더하고 말의 갈기나 꼬리털 또는 천을 나무에 묶고 돈이나 음식의 가장 좋은 것을 바치는데, 가진 것이 없을 경우 자신의 머리털을 조금 잘라 바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공물로는 흰쌀(차강 보다), 좁쌀(샤르 보다) 등의 곡물과 흰사탕, 유제품, 술 등으로 사찰을 드리며 어워를 시계 방향으로 3번 도는 풍습이 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8.12.25

 

몽골의 신앙과 종교 - 불교 
  
불교는 기원전 6세기경에 인도에서 발생하여, 7세기경 티베트에 전파되었다. 티베트 불교를 일명 라마교라 하는데 라마란 티베트 불교에서 ’정신적 스승’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이렇게 원래는 사원의 지도자나 위대한 스승에게만 붙일 수 있었던 ‘라마’라는 명칭이 오늘날에는 일반 승려에 대한 경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몽골에 들어온 티베트 불교를 라마교라고 한 이유는 티베트 불교의 새로운 개혁 종파가 경전보다는 스승의 가르침 즉 ‘라마’를 존중한 데서 붙여진 명칭으로 생각된다. 11세기 인도에서 도래한 티베트 불교의 개혁가인 아티샤(982-1054)는 경전과 개인적 가르침 중 어떤 것이 더 중요한가를 묻는 제자의 물음에, 직접적인 스승의 가르침만이 올바른 이해를 보증한다고 하여 스승의 가르침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그 후 티베트 불교에서 라마는 더욱더 중요한 존재로 부각되었으며, 이 때문에 티베트의 불교를 라마교라고 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티샤는 인도의 고승으로 티베트 제자들의 간청으로 마음을 닦는 수행법을 가르쳤다. 그 수행법을 ‘람림’이라 하는데, 람림에서는 가장 먼저 정신적인 스승에게 완전히 의지하라고 가르친다. 이처럼 개혁파 불교에서 스승을 강조하기는 했지만, 이 불교를 곧바로 라마교라고 부르는 것은 올바르다고 할 수 없다. 라마교라는 것은 청나라 시대 중국인들이 몽골 불교를 비하하기 위해 붙여진 명칭이다.
티베트 불교는 불교의 전통적인 계율을 따르면서 티베트 재래 종교인 본교의 무속적 특색을 포용하는 특색을 지닌다. 티베트 불교는 황건파와 홍건파(티베트의 타르마파 승려들이 붉은 모자를 쓰고 다녔다면, 새로운 게룩파의 승려들은 노란색 모자를 쓰고 다닌 것에서 생겨난 말)의 두 경향의 경쟁적 관계 속에서 매우 빠르게 퍼져나갔다. 불교를 현대적인 형태를 가지도록 변화시킨 사람은 티베트의 승려 정호브(총카파)였기 때문에, 티베트 불교를 때때로 ‘정호브교’라고도 부른다.
13세기 티베트 불교는 정치와 종교를 장악하여 심한 부패에 이르게 된다. 승려들의 수행은 겉치레에 불과했으며 참다운 수행과 종교적인 모습이 사라졌다. 14세기 후반 정호브가 등장하면서 세속화된 불교에 종교적 수행과 금욕을 강조하는 개혁을 이룬다.
불교가 몽골에 강하게 전파된 것은 16세기 말 경이지만, 그 이전에도 몇 차례 불교가 전파되었던 역사가 있었다. 일반적으로 흉노시대부터 간헐적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던 역사자료가 있다. 토와의 웨이국 시대(386-534) 불교를 국교로 삼고 정치와 종교의 예법에 따라 정책을 세웠다. 토와족들은 당대 몽골에 있던 유연(400-552)족들이 불교를 접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 시대에 불교 유물은 거의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 다음 몽골 땅의 지배적 다수를 차지했던 투르크에는 불교가 전파되었었다는 분명한 자료가 있다. 투르크의 제3대 왕은 불교사원과 소브륵(탑)을 세우는 등 불사에 적극적으로 힘썼으며, 그 다음 왕대부터는 불교가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 다음 부족국이었던 위구르에서도 불교가 상당히 널리 퍼졌으나 점차 그 지위가 약해졌다.
불교가 몽골에 들어온 역사적 시기는 13세기이다. 칭기스칸은 몽골의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세계 정복에 이르게 되었을 때, 여러 나라의 종교 문제에 있어 상당히 관대한 입장을 취했다. 가족 간에 종교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도 각자 자유로운 선택권을 가지도록 했다. 그래서 가족의 어떤 이는 이슬람교도,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며, 어떤 이는 불교를 선택했다.
이란의 역사가 쪼웨이니는 “칭기스는 어떤 한가지 종교나 신앙을 신봉하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고착된 신앙적 태도나 어떤 종교를 다른 종교보다 더 낫다고 차별적으로 보는 것을 피했다. 그리고 어떤 종류의 종교적 현자나 수도자라도 차별 없이 존중했다”고 기록했다. 이렇게 칭기스칸은 종교적으로 상당히 관대한 입장에 있었지만 스스로는 전통적인 무속을 신봉하여 결정적인 사건에 마주치면 영원히 푸른 하늘의 가호를 비는 의식을 행하고 무당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또한 외국의 용한 점쟁이나 점성가들의 예언이나 조언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다. 칭기스칸은 거란인 야율아해나 아율초재와 같이 양의 견갑골로 점을 치는 점쟁이들을 주위에 데리고 있었으며, 원정을 떠나기 전 점을 쳐보게 하기도 했다. 또한 도교 교단의 장로인 장춘진인(長春眞人)에게 방문해 줄 것을 요청하여 장생의 비법을 묻기도 했다고 한다.
어거대칸 시대 수도 하르호름에는 여러 나라의 다종교가 혼재되어 있어 그 대표자들이 상주하여 살았다. 즉, 불교, 이슬람교, 기독교 등의 사원이 있었으며 시에서 활발한 전도 활동을 벌였다. 종교적인 포용 정책으로 몽골에 들어온 다종교 가운데 점차 불교가 몽골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는 조건을 형성시켰다. 하르호름에 있는 사원에 위구르 승려들이 법회를 열었으며, 불교 경전을 번역하는 작업이 진행되어 불교를 중앙아시아에서 몽골에 전파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9.1.6

 

불교(2) 

원나라가 중국에 세워지기 전에 몽골 군주국의 초기 칸들은 티베트의 불교와 가까워져 불교를 지원하는 정책을 폈다. 1220년대부터 몽골과 티베트의 관계가 크게 발전했으며, 1227년 탕구트를 침공한 후 몽골은 티베트의 넓은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몽골 칸들은 그 당시 불교국이었던 티베트를 직접 무력으로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유화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권하에 복속시키려는 정책을 썼다. 또한 그들은 티베트 불교를 많은 복속국들을 지배하는 통치도구로 삼고자 했다.
칭기스칸 시절에 일곱 명의 티베트 승려가 몽골에 왔으나, 몽골 무당들의 저항으로 인해 오래 머물러 있지 못하고 탕구트로 돌아가고 만다. 그들 승려 가운데 찬바-돈고르바 링보치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칭기스칸을 만나 불교의 교훈을 전하기도 했다. 그 다음으로 칭기스칸이 탕구트를 침공하고 돌아오던 1227년에 다시 그와 만나 승려들에게 세금과 공무를 면제해 주는 것에 관한 명령을 내렸으며 또 탕구트에 있는 절과 사원을 복원하는 일에 관한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또 이 해 칭기스칸은 탕구트의 보르항칸을 만났으며, 그로부터 황금 불상과 황금, 은제 그릇을 선물받았다고 전한다.
몽골의 칸들은 또 중국 불교 승려들과도 적지 않은 교류를 가졌는데, 1219년 중국 불교 승려인 해융이라는 자가 칭기스칸을 처음으로 만나게 되었다. 칭기스칸은 그에게 불교에 대해 적지 않은 지식을 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그 시절 칭기스칸은 중국의 불승들에게 공무와 세금을 감해주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한 특혜를 다음 왕들도 계속 시행하여, 구육, 멍흐 왕은 해융을 북중국의 불교 지도자로 임명했다.
 어거대칸은 아버지의 포용 정책을 계승하여 실천했으며 티베트의 승려들과 우호적인 교류를 가졌다. 이 시절 북인도에서 승려들이 몽골에 왔으며, 그들은 궁에 머물면서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구육왕은 티베트 승려 나모를 모셔와 자신의 스승으로 모셨으며, 멍흐칸은 승려 나모를 국사로 삼고 왕국의 불사를 통괄하도록 했다. 
몽골 군주국의 초기에 불교가 대단한 영향력을 미쳤던 것을 확증해 주는 중요 자료는 1346년 씌어진 에르젠 조 사원 터에서 발견된 돌비석이다. 여기 기록을 보면, 어거대칸은 불교 사원의 큰 터를 처음 정했으며 1256년 멍흐칸이 절을 지어 완성한 일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대 티베트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원은 1073년에 세워진 사쯔사원이었다. 몽골의 지도자들은 무엇보다 먼저 사원의 영향력 있는 주지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불교를 몽골 제국에 널리 전파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일을 위해 티베트에 있던 몽골의 대신 거당과 북중국을 다스리고 있던 쿠빌라이 등이 사쯔 사원의 주지들을 자신들이 살고 있던 곳에 자주 모셔와 만난 것은 불교를 제국에 전파시키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1244년 티베트에 주재하던 대신 거당은 사쯔 사원의 대주지 스님인 공가아잘창에게 초청 서한을 보낸다. 공가아잘창과 거당의 만남은 티베트와 몽골의 관계를 가깝게 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으며, 이로 인해 몽골 칸과 귀족들은 티베트 불교를 상당히 존숭하게 된다. 이런 가운데 몽골과 티베트의 관계는 더욱 확대되고, 티베트 불교의 영향이 몽골 왕족들 가운데 더욱 큰 영향력을 가지는 조건을 형성했다.
 티베트 불교는 쿠빌리아칸이 다스리던 원나라 시대에 몽골 대제국의 중심 종교로 발전한다. 쿠빌라이는 1260년 칸이 되기 전 북중국을 지배하고 있을 때, 불교를 제국의 지배 도구로 삼으려 했던 거당의 정책을 계속 추진하여 티베트의 사쯔 사원과 관계를 긴밀히 했다. 그리고 1253년 경 거당의 궁으로 사신을 보내 사쯔 사원의 주지승인 공가아잘창을 모셔오도록 한다. 거당은 2년 전인 1251년에 공가아잘창이 죽었다는 사실을 쿠빌라이에게 알렸으며 한편 공가아잘창의 손자 파스파러더이잘창(1235-1280)이 자신의 옆에서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했다. 1247년 공가아잘창이 거당을 방문할 때 손자 파스파와 그의 동생 차그나도르찌를 데리고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당시 거당은 공가아잘창의 두 손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유심히 살펴보았었다. 거당의 명으로 파스파에게 불경을 공부시키고, 차그나도르찌에게는 몽골 문자를 가르치게 했다. 이렇게 사쯔 사원의 두 아이들은 몽골 대신의 궁 가까이서 교육을 받게 된다.
쿠빌라이칸은 1253년 당시 18세가 된 파스파를 샹도에 있는 자신의 궁에 데리고 와 자신의 제의 승려로 삼았다. 1258년 쿠빌라이 주였을 대 파스파가 도시들을 이긴 일이 있었다. 그 이후 쿠빌라이는 도교를 금하고 불교를 모든 면에서 적극 지원했으며 승려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과 특권을 주게 되었다.
1260년 쿠빌라이칸이 왕좌에 오르면서 파스파를 국사로 추대하고 불교를 제국의 종교로 삼았다. 칸과 왕비, 신하와 귀족들은 파스파에게 계를 받고 불교도가 되기 시작했다. 쿠빌라이칸이 1264년 샨도시에 있을 대 썼던 <솝등 자르릭>이라는 칙서 가운데 몽골 왕에게 보내는 불교 정책을 자세히 언급했다. 그 문서에는 “불법대로 살아가는 불교 승려들은 몽골 대왕에게 복종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여러 가지 공적인 의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 불교의 사원에 사신이 거주하거나, 사원 관할 하의 지역과 재산을 사용하거나 소유하는 것을 엄격히 금한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여러 공문서 등을 살펴보면 원나라 시대에 불교가 특별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파스파는 몽골 제국의 정치를 불법(佛法)의 질서로 바로잡고자 했으며, 몽골 왕들을 고대 인도와 티베트 왕들과 동등하게 보아 그들에게 ‘차그라바르디’-불교를 수호하는 무한한 권력의 주인-대왕이라는 칭호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쿠빌라이칸은 다른 종교에도 상당히 관대하여 카톨릭의 많은 수사들을 받아들이도록 지시했으며, 로마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태도의 배후에는 카톨릭 신부들을 국사에 이용해 중국 내에서 자신의 지배력을 더욱 확고히 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또 신부들의 앞선 지식과 능력을 이용하려는 계략도 있었다. 원나라 시대 쿠빌라이칸은 서방 카톨릭 신부와 수사에게 나라의 점성술사들과 함께 계절과 천체에 관한 저서를 짓게 했으며, 천문대를 짓는 일을 맡겼다. 1289년 쿠빌라이칸의 명으로 최초의 서방 종교인들(주로 카톨릭)의 사원을 짓게 했다. 일반적으로 몽골에 기독교는 상당히 이른 시기부터 전파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나이망, 헤레이드, 엉고드 부족이 기독교를 믿었다는 역사적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서방의 종교는 몽골에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원나라 시대에 이슬람교도들은 몽골 칸들의 정치적인 행사에 신뢰를 주는 일들은 했으며 비교적 큰 권한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몽골의 많은 종교 가운데 이슬람교 역시 그리 대단한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원나라의 몽골 칸들은 이슬람교도들을 이용하여 주로 중국을 통치하는 정책적 도구로 삼았다.
원나라 시대에 몽골의 칸들은 중국에 널리 퍼져 있던 유교와 도교를 금지하지 않았으며,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지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융화적 태도는 매우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루어졌다. 무엇보다 중국인들 가운데 큰 명성을 얻었거나 영향력이 있는 유가 혹은 도사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했다. 특별히 도사들에게 공적인 세금을 면제해 주고, 유교 사당을 부흥시키고 제를 드리게 하는 등의 일을 지원했다. 그와 동시에 유교와 도교의 영향을 몽골 지역에 전파되는 것을 보이지 않게 엄격히 규제하는 이중 정책을 썼다. 일반적으로 그 시대 몽골 칸들은 유교와 도교의 가르침을 나라의 중심 종교로 삼지 않았다. 또한 그러한 종교적 확산과 영향력을 막기 위해 티베트에서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이것은 사상적으로 중국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의 한 방편이었다.
그러나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던 가장 주된 이유는 다종교, 다언어의 나라와 부족들을 불교라는 하나의 정신적 구심점 즉 정치적 통치이념으로 통일시켜 지배하려 했던 정책에서 비롯되었다. 몽골의 칸들은 종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가지 엄중한 법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쿠빌라이칸의 한 칙령에 티베트의 스님, 수도승 등에게 함부로 손을 댄 사람의 손을 자르고, 함부로 모욕하고 멸시한 사람의 혀를 뽑는 등에 관한 잔혹한 법을 제정하고 스님들에게 접근할 수 없는 신성한 권한을 법으로 분명히 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9.1.12

 

몽골의 신앙과 종교 - 불교(3) 
  
종교적인 면으로 쿠빌라이칸이 행한 정책을 다음의 칸들이 계승해 나갔으며 티베트 사쯔 사원의 함바(주지승) 등 영향력 있는 승려들을 수도에 차례로 모셔와 티베트 승려와 친분을 맺고 다방면으로 종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몽골의 칸들은 사쯔 사원과 교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티베트의 영향력 있는 다른 사원과도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몽골의 칸들은 또 티베트의 공탕 사원과도 밀접한 관계를 맺었는데, 13-14세기에 공탕 사원은 티베트의 사원들 가운데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사원이었다. 공탕 사원의 주지승들은 찰 지역의 지도자 역할을 함께 수행했다. 몽골의 칸들은 이 강성한 사원과 관계를 맺어 사원을 통해 티베트를 자신의 권하에 복속시키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나갔다. 쿠빌라이칸은 공탕 사원의 함바들을 궁에 자주 모셔와 친분을 유지하며 그들에게 매우 호의적으로 대했다. 
쿠빌라이를 위시하여 몽골의 칸들은 많은 지역에 절과 사원을 짓고 옛 사원을 보수하는 일을 했으며, 불교의 많은 경전을 몽골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는 작업을 했다. 이렇게 이 시대에 상당수의 사원을 짓고, 승려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는 등 불교를 보호하려고 했던 정책에 저항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특별히 티베트 민중들 사이에 종교의 명분으로 몽골 칸들과 공모했던 사쯔 등의 사원 권력자들에게 반대하고 저항하는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났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몽골의 피정복자들에 대한 저항 운동이었다. 이러한 저항으로 마침내 티베트에서 오는 승려들의 수가 제한적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원나라 시대 불교는 몽골 지배 계급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기는 했지만, 민중의 대부분은 여전히 무속을 신봉했다. 이 시대에 조상숭배와 어워제, 화제(火祭) 등의 전통적인 제의를 드릴 때에는 여전히 많은 무당들을 불러모아 굿을 하게 했다. 마르코 폴로는 기행문에서 쿠빌라이시대 몽골 무당들은 어거드를 모셨다고 했으며, 다른 한 여행가는 몽골의 해몽가, 점쟁이, 민간 주술 요법사 등의 대부분이 무당들이었다고 기록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전통적인 무교와 불교 및 도교의 갈등이 적지 않게 배태되었다. 
쿠빌라칸은 불교를 원나라의 정치적 중심 종교로 삼았지만, 실제로 몽골에 무속을 압박하고 없애는 칙령을 내리지는 않았다. 14세기 몽골의 알탕칸은 티베트의 달라이 람 서드넘짬츠와 불교를 몽골에 전파시키고 무속을 금하는 것에 관한 약조를 했지만, 쿠빌라칸과 승려 파스파 사이에는 다만 불교를 전파시키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었을 뿐 무속을 금하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않았다.
이처럼 13, 14세기 귀족 사회에 불교가 퍼져나가기는 했지만, 내부적으로 여전히 무속 신앙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불교가 사회 전반에 그렇게 강하게 침투되지는 못했다. 원나라가 멸망한 후 불교의 영향은 상당히 약화되었으며,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기층 신앙인 무속을 신봉함으로써 무속은 생활 속에서 확실한 위치를 점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그 시대에도 불교 전통은 끊어지지 않았다. 티베트 황교가 16세기 말엽 몽골에 다시 부흥해 힘있게 전파되기 전에도 티베트와 중국의 국경에 근접되어 있던 몽골 서부와 남부 일부 지역에서는 불교가 여전히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대왕의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오이라드의 권문 귀족들은 큰 스님들에게 국사라는 지위를 주고 명나라에 조공을 보내는 사절단들의 구성원에 명성 있는 티베트, 몽골 스님들을 포함시켜 명나라 황제에게 청해 불교 제의 용품을 가져오도록 했다.
그 당시 불교는 지역적으로 산재하여 그 생명을 지속하다가, 16세기에 이르러 몽골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한다. 이 때 불교가 짧은 기간 안에 무속을 제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불교를 정치적 힘으로 포교시킨 점 이외에 불교가 의례와 위엄 있는 외관 등의 면에서 무속보다 훨씬 문화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승려들은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을 금하고 온유하고 관대한 가르침을 폈다. 이러한 가르침은 봉건주의의 오랜 싸움과 참화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던 몽골 민중의 정서를 위무해 주었기 때문에 불교는 매우 빠르게 민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원시시대부터 몽골인들의 사고와 정서를 지배해 왔던 무속은 16세기 말엽에 이르러 핍박을 받음으로써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티베트 불교는 16세기 중기를 지나 더욱 활발하게 전파된다. 몽골의 투멩 자사흐트 칸(1558-1593)은 1576년 티베트 홍건파의 종수인 일동을 자신의 궁에 초대해 사제 관계를 맺고, 동부 조르강 투멩 가운데 홍교를 전파시켰다. 투멩 칸은 귀족들과 의논하여 1576년에 불법을 중심으로 하는 대법령을 선포했으며 이를 정치적 지배 원리도 삼았다. 투멩칸은 처음에는 홍교를 받아들였으나 나중에 황교의 뛰어난 점을 알고 황교를 신봉하게 된다. 
투메드의 알탕 항(1507-1582)도 달라이 라마와 만나기 몇 년 전인 1570년 초부터 티베트 황교의 승려들을 중국 명나라를 통해 모셔왔다. 몽골에 불교 전통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었지만 실제로 황교를 몽골 전역에 강하게 전파시키는 데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알탕 항이다. 그는 불교를 전파시키는 정책을 대단히 적극적으로 폈으며, 1578년에 티베트 황모파(일명 ‘게룩파’라고도 함)의 조종인 서드넘짬츠를 모셔와 귀족 및 신하들과 함께 불교에 귀의했다. 그리고 불교를 자신의 지역에 널리 전파시킬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했다. 이 만남으로 알탕 항은 티벳 황교의 종수인 서드넘짬츠에게 ‘오치르다라 달라이 라마’라는 불교의 큰 칭호를 내렸다.
그는 고대부터 내려오던 순장 제도를 금지시키고, 모든 우상들을 불태웠으며 말이나 가축의 피로 제의를 드리는 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 포고형을 내렸다. 알탕 항은 명나라와 우호 관계를 맺는 동시에 티베트의 황교를 받아들여 불교의 힘으로 칭기스칸의 직계 계승자들보다 부족하지 않은 권력과 힘을 얻어 황제에 추대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명나라의 황제에게서 ‘슈니-왕’ (정의의 왕)이라는 칭호 이외에 티베트 조조으로부터 ‘노밍 항’이라는 불교의 큰 칭호를 얻게 된다.
몽골의 다른 지역장과 귀족들도 알탕 항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자신의 지역에 불교를 전파시키는 데 주력하게 된다. 동부 할하 몽골의 아브태 샌 항(1554-1588)은 1581년부터 시작하여 세 번에 걸쳐 달라이 라마 서드넘짬츠와 만났으며, 1586년 달라이 라마가 두 번째로 투메드 지역에 왔을 때 황교에 입교했다. 달라이 라마는 그에게 불상을 선물했으며, ‘어치르바트 투세트 칸’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아브태샌 항은 할하 몽골에 1586년 황교 최초의 사원인 에르덴 조를 세워 불교의 본거지로 삼고, 불교를 몽골에 정착시키는데 힘을 기울였다.
17세기 중엽부터 할하 몽골에 최초의 버그드 자브짱담바인 자나바자르(1635-1723), 롭상페렝레이(1642-1715) 등 학식 있는 큰 스님들이 나왔으며, 이들은 몽골에 불법 포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다.
몽골에 불교가 크게 전파된 데에는 몽골의 국내외적 상황과 연관이 있다. 국내적으로는 봉건제가 무너지는 상황에 처해 있었으며, 그 기층 부류인 통치자 즉, 지역 왕과 귀족들간에 더 나은 권력과 명성을 얻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하고 투쟁하는 상황에 있었다. 서로 경쟁하고 있던 권력자들은 황교를 전파시키는데 있어 전 몽골민중의 권력과 이익을 생각하는 것보다 자신들의 명성과 권력을 확고히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들은 달라 라마에게서 가능한 한 높은 칭호를 얻기 위해 경쟁했으며, 황교의 힘으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고 애썼다.
다른 한편 칭기스칸의 직계 왕들인 투멩칸(1588-1592), 바양 세쳉(1593-1602), 리그뎅칸(1604-1643) 등은 전국을 통합하는 힘이 부족했을 뿐만 아니라 황교를 그렇게 주목하지 않았다. 반면 원나라의 종교 정책의 전통을 고수하여 카르마파(전통파, 홍교) 특히 사쯔의 불교 가르침을 더 지지했다. 몽골 마지막 칸인 리그뎅 호트흐트는 쿠빌라이칸의 본을 따라 사쯔 사원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큰 스님들을 자신의 궁에 모셔와 정치와 종교가 결합된 정책을 펼침으로써 몽골의 통일을 확고히 하기 위해 노력했다. 리그뎅은 16세기 말엽부터 몽골 문화의 회복과 발전을 위해 적지 않은 노력했지만, 나라를 통합하고자 했던 국가 정책은 성공하지 못했다. 옛 사쯔의 가르침을 크게 고수했던 것은 새로이 발전해 가는 황교도들의 저항에 부딪치게 되었으며, 그것은 리그뎅을 만주 앞에 외톨이로 몰아넣었다. 
불교가 통치자들의 야심에 의해 몽골에 전파되긴 했으나 그 시대 상황에 몇 가지 긍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즉, 귀족과 봉건 영주들 간의 투쟁과 위기를 어느 정도 약화시키고, 한 집단의 정치인 결집을 확고히 하며 민중들에게 문자를 전파시키고 불교 문화를 받아들임으로써 자국의 문화를 발전, 확대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몽골의 지방 통치자들과 귀족들은 불교의 서로 다른 분파를 옹호하면서 불필요한 경쟁을 하고, 자신의 확고한 지위를 굳히기 위한 일환으로 가능한 한 불교의 높은 칭호를 얻기 위해 애썼던 것은 마침내 그들의 이익과 관심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나라의 독립을 잃게 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9.2.6

 

불교(4) - 만주 지배기와 그 이후의 불교 
  
이 시기에 이웃 나라 만주족은 점차 강성해져, 몽골을 침략할 때 무력으로뿐 아니라 그 당시 몽골에 새로운 힘으로 침투했던 황교를 자신들의 지베 정책에 교묘하게 이용했다. 무엇보다 먼저 만주의 왕들은 티베트 황교의 권력자들과 직접 관계를 맺고 불교를 옹호하고 지원하여, 몽골 지배를 위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만주 왕들은 비록 몽골인들과 가까운 종족이었지만, 그들은 칭기스칸의 가계와 아무런 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몽골인들의 황제로 자처할 만한 근거가 부족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러한 부족함을 이념적으로 제거하고 보충하기 위해 불교를 끌어들였다. 만주 왕들은 앞서 쿠빌라이칸이 실행했던 종교와 정치의 양면 정책을 새로이 진행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을 몽골 대왕의 유업을 이을 타당한 계승자로 만들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려고 애썼다.
만주의 아바해 황제(1592-1643)는 처음에 많은 양의 금으로 원나라 시대 국사 파스파의 상을 만드는 등 불교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함으로써 몽골 사람들의 인심을 사려고 노력했다. 1630년 중엽 남부 몽골인들은 특별한 저항없이 만주를 따르는 나라가 되어 그들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주는 동?서부 몽골의 지배정책을 시행할 때도 불교를 이용했다. 그 당시 만주는 여러 가지 기만적인 방법으로 티베트를 자신의 권력하에 포섭하고, 불교 권력자의 힘과 노력을 이용하여 몽골을 장악하는 정책에 적절히 이용했다. 몽골 전역이 만주의 통치에 들어간 200년 이상의 기간 동안 황교의 지위는 대단히 확고해졌다. 몽골의 기층 신앙인 무속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핍박하였으며 그 의례와 습속의 적지 않은 부분을 불교에 습합시켜 몽골 유목민들의 특수한 생활에 불교를 놀랍게 조화시켰다. 
고대 인도 기원의 불교가 티베트 황교의 형태로 몽골에 전파되어 독점적인 위치를 점하게 되면서, 몽골 민중의 생활과 문화, 도덕, 관습 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몽골의 유목 문화는 자신들의 수천 년 역사 중 외래 종교, 문화에 그렇게 크게 영향을 받은 적이 없었다. 만주가 1644년부터 150년 이상 정책적으로 불교를 몽골에 전파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 결과, 1800년대 초에는 몽골에 1,000개 이상의 사원이 생겨났다. 승려들은 사회적으로 특별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인 일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만주는 불교의 지도자를 비롯해 일반 승려들을 그다지 존중하지 않았다. 1826년 5대 자브짱담바가 북경에 가서 만주 황제를 찾아가 인사를 하려고 했으나, 만주 정부에서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으며 활불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방문을 허락하지 않고 접견을 미루었다. 1830년 자브짱담바가 다시 황제를 찾아갔을 때 그를 만나주기는 했으나, 여행 경비를 국고에서 내주지 않고 승려들에게 추렴해 충당하라고 명했다. 이와 같이 만주는 몽골의 불교 지도자의 권한과 행위를 제한했으며, 자신의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불교를 이용하고자 했다. 
만주는 불교를 이용하여 몽골인들의 마음을 유하게 하고, 지배를 용이하게 하려했으나, 오래지 않아 만주 정부는 불교가 몽골 전체를 결집시키는 커다란 힘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이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경계를 가지게 된 동기는 불교의 성인의 15번째 화신인 자브짱담바를 몽골 최초의 버그드 칭기항칸의 황금 가계인 투셰트 항 검버도르찌의 아들 잔바자르로 삼는 데 있었다. 이렇게 몽골의 불교 지도자가 몽골의 지배력있는 가문에서 나왔다는 것은, 만주의 정책과 움직임에 반대하는 세력을 중심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이 점을 경계해 만주는 제3대 버그드로부터 티베트에서 출생한 활불을 데려와 버그드(불교의 종교적 최고 지도자)로 삼았다.
20세기 초 몽골의 종교와 정치 지도자였던 제8대 버그드 자브짱담바 활불은 1869년 티베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1874년 5세 때 몽골에 의도적으로 보내진 종교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 궁전의 많은 선생과 그를 모시는 승려들의 가르침에 따라 엄격하게 짜여진 일과에 따라 생활을 했다. 궁전의 몽골 스승들은 그를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를 삼가고 몽골의 생활과 풍습, 몽골 사고방식에 젖도록 특별히 유념하여 가르쳤다. 이러한 이유로 해서 자브짱담바는 비록 티베트 혈통이지만 어떤 일에든 몽골 풍습과 예법을 기본으로 했으며, 몽골어를 티베트어보다 더 능통하게 잘했다. 그는 젊어서부터 종교와 일반서, 그 가운데 동양 문학의 진수인 많은 작품을 스스로 번역했다. 어려서부터 신앙시되고 존숭을 받았으며 상당한 특권을 누렸지만 자브짱담바는 자만하지 않고 사려깊게 처신했으며, 생각한 것을 이루기 위해 일관성 있게 분투하는 용기있고 기민한 사람이었다. 
그가 성인이 되었던 20세기 초에 몽골과 세계는 심한 변환기에 있었다. 만주 지배에 이백 년 이상 고통을 받으며 지친 몽골 민중들의 민족의식이 크게 회복되었고, 몽골이 왜 세계 발전에서 뒤처져 있는가, 어떻게 하면 나라를 다른 나라와 같이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고심하게 되었으며, 외세의 압박에서 벗어나 국가와 민족을 한 단계 위로 끌어올릴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불교를 보호하고 정치적 독립을 회복하려는 경향이 표면화된 것을 만주 정부는 예의 주시했다. 그리고 새로운 정책의 중요한 일부분이 종교 문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려들을 정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게 하는 데 특별히 주의를 기울이게 되었다.
버그 자브짱담바는 1898년부터 몽골에 만주 독재자들이 보내온 새 정부 정책이라는 것에 즉각 반대 입장을 취했을 뿐 아니라, 만주로부터 독립할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생각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내몽골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귀족들과 이 문제를 논의했으며, 조국 해방에 대한 강한 염원을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독립 문제를 비밀리에 상의하기 위해 버그드 산에서 법회를 연다는 명분으로 회의를 소집했다. 또 이 대사를 자력으로 이룰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대표자들을 보냈다. 그 당시 몽골 전역에서 자유와 독립의 움직임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고, 몽골의 정치?종교적 활동가들이 8대 버그드 자브짱담바와 연합하고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 조정은 그들의 희망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이렇게 내외적인 조건이 이루어지자 몽골의 영향력있는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일을 추진했으며, 1911년 겨울 이흐 후레의 귀족들이 다시 모임을 갖고 독립 문제를 논의했다.
몽골의 불교는 역사의 오랜 기간을 함께 하면서 몽골 민중의 삶과 문화, 도덕, 관습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몽골의 사원의 수는 해마다 늘어 20세기 초에는 750개 정도에 이르렀으며, 사원에 거주하는 수행자 및 승려의 수는 115,000명 가량 즉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했으며, 남자의 3분의 1 이상이 승려가 되었다. 수도의 사원들은 교육과 문화의 온상이 되었으며, 상업과 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사원은 문화적으로뿐 아니라 경제적인 면에서도 확고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200년 이상 만주의 지배 하에 있던 몽골은 외국과의 접촉이 이루어지지 않아, 세계의 발전적 상황과는 상당히 동떨어지게 되었다. 이런 고립된 상황에서 지성과 문화, 교육의 자리에 불교가 제한 없이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다. 교육의 처음 단계로 5-6세가 된 어린이들은 승복을 입고, 절에서 생도로 살면서 티베트어로 된 책을 암송했다. 이렇게 몇 년을 공부하다가 사원의 학부(다창)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9.2.6

 

불교(5) - 만주 지배기와 그 이후의 불교 
  
몽골에 황교가 전파되던 초기에는 승려들이 모국어인 몽골어로 가르치고 책을 몽골어화하는 일에 적지 않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점차 그러한 풍속은 사라지고 모든 책들이 티베트어로 사용되었다. 몽골의 승려 가운데는 티베트어에 통달한 사람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었으며, 그들은 모국어가 아닌 티베트어로 저술 활동을 했다.
몽골 사람의 대다수가 불교 신자가 되었으며, 그들은 마침내 불교문화의 커다란 세계에 흡수되었다. 몽골의 불교는 만주가 의도했던 것과는 달리 그 힘이 커져 승려들이 나라의 정치, 독립 운동에까지 참여하게 결국 1911년 만주로부터 나라를 찾게 된다.
1912년 러시아 볼셰비키의 영향으로 몽골에 이루어졌던 민주 혁명의 결과 몽골의 종교적 운명은 돌연 반전했다. 새로운 정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불교를 제압했으며, 1924년부터 “불교는 마약이요, 승려는 혁명의 적이다.”라고 선포하고 종교적 활동을 억압했다. 1929년 1월 자브짱담바의 화신이 현현되는 것을 완전히 금했으며, 10월에는 많은 이름있는 승려의 사진을 파는 행위를 금지시켰다. 이와 같은 결정은 몽골의 종교사에 미증유의 사건이었기 때문에 승려뿐 아니라 신자, 전체 국민들의 정서에 깊은 상처를 주었으며 당과 정치의 명예를 떨어뜨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때부터 사원의 재산과 건물, 사원의 모든 재정에 세금을 더욱 가중되게 부과하게 되었으며, 사원이 부를 축적하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1930년 국가 6차 대회의에서 18세에 이르지 않은 젊은이들이 승려가 되어 사원에서 지내는 일을 완전히 금지시켰다. 1937-1939년에는 승려들을 반동분자라 하여 숙청하고 수많은 사원을 폐쇄시켰다. 확인되지 않은 기록에 의하면 약 17,000명의 승려들이 사형 당했다고 한다. 그때까지 존재했던 771개의 사원 가운데 1938년에는 11개의 사원만이 남았으며, 1940년에는 유일하게 간등사에서만 법회가 열렸다. 1980년대 말부터 몽골에 민주화와 개혁의 바람이 일자 불교는 다시 민중 대다수의 신앙심을 일깨우기 시작했으며, 1997년에는 절의 수가 200개 이상으로 늘어났다. 현재 불교를 나라 발전을 위한 정신문화의 한 힘으로 보고, 여러 면에서 불교 장려 정책을 펴고 있다. 
자나바자르(1635-1723)
자나바자르는 칭기스칸 가계인 할하의 투셰트 항 검버도르찌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5세에 할하의 불교의 종수인 제1대 버그드 자브짱담바 즉 활불 버그드 칭호를 받는다. 자나바자르는 어려서 티베트의 5대 달라이 라마 악그와앙롭상잠츠 아래서 제자로 지내며 불교의 이론과 교훈, 여러 학문을 습득했다. 20세 고향 가까운 어워르항가이의 터브흥이라는 곳에 절을 세우고 그곳 동굴에서 명상을 하며 지냈다. 그는 이곳에서 몽골의 정치, 언어, 문화 발전의 위대한 작품들을 창작했다. 
또 1686년 이곳에서 몽골의 독립을 상징하는 서염보 문장과 문자를 만들었다.
언더르 게겡(활불) 자나바자르는 정치, 종교뿐 아니라 17세기 건축, 미술, 소조, 조각 등 예술의 우수한 기념물들을 창작한 몽골의 위대한 불교 예술가였다. 그는 자신의 독창적인 예술적 기법으로 수많은 건축, 미술품들을 창작했으며, 유목민의 지성적 사고와 상징이 혼재되어 있는 그의 작품들에는 몽골 특유의 예술혼이 깃들여 있다고 평가된다. 그의 작품은 처이징 람 박물관과 버그드 항 박물관, 예술 박물관 등 울란바타르시의 중요 박물관에 전시, 보관되어 있다. 
정호브(총카파 1357-1419)
정호브는 티베트 불교의 개혁자이며 황건파 불교의 기초자이다. 그는 몽골 예술, 종교, 철학 사상의 전통 유산과 불가분의 관련이 있는 위대한 인물 중 한 사람이다. 정호브는 1357 년 티베트에서 태어났으며 7살에 출가하여 16세에 종교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25세에 카규르(강쪼오르), 텐규르(단쪼오르), 인도 철학을 연구하기 시작했으며 36세 때 부처님의 연기설에 대한 참된 깨달음을 얻게 된다. 그는 불교의 의례와 신앙적 도덕성으로 승려의 본령과 이름을 높이는 데 매우 주력했다.
53세 때 티베트에서 고승들이 참여한 대법회를 인도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불교 예법을 새롭게 개혁하는 계기가 되었다. 불교 의례와 재를 드리는 의식을 개선하고자 했던 것은 일반 신자들의 생각과 부합하여, 불교 개혁의 폭넓은 지지 기반을 마련한다. 그의 개혁 정신은 티베트에 있던 종교의 수많은 흐름을 바꾸고, 점차 황모파 혹은 “정호브교”가 널리 퍼지는 근거를 마련하였다.
정호브는 불교의 쇄신을 도모하고 신앙의 규례를 새롭게 했으며, 불교 의례를 신자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개선했다. 그는 불교의 실천적인 활동 이외에 높은 철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313권의 수준 높은 불교 이론서를 저술했다. 그의 이러한 탁월한 활동으로 인해 그는 티베트에서 뿐 아니라 몽골에서도 신성으로 추앙되었다. 

참은 종교와 신앙의 적대자를 제압하는 불교 활동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가면 의식무이다. 참은 고대 인도에서 발생하여 티베트를 거쳐 몽골에 전해졌다고 본다. 
처음 인도에서 발생할 때는 예술적인 춤의 하나였으나, 불교 발생 이후 불교의 주제를 가진 공연물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불교적인 주제만을 가지게 되었다. 
참은 순수한 불교 의식무의 형태로 아시아 여러 나라에 펴졌다. 현재는 종교적인 성격에서 문화 예술적인 방향으로 변화되고 있다.
테베트 참은 고대 인도의 시바 신앙과 불교, 본교(무속)가 혼합되는 성격을 가지고 있으며, 몽골에 퍼진 참에도 불교적인 것에 몽골 무속과 신화적 사고, 장인들의 예술적 사고가 혼재되어 있다. 
참은 기존의 종교와의 투쟁과 갈등 속에서 생겨났기 때문에 처음부터 비밀리에 행해졌으며, 승려 가운데 계를 받은 승려의 일부가 참여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던 매우 분명한 목적을 가진 불교 의례였다.
몽골에서 참이 처음 행해진 것은 1723년 오이라드의 중가르에서였으며, 그 다음에는 1786년에 에르덴조 사원에서 행해졌다. 
이흐 후레의 경우는 1811년에 처음 참의식이 베풀어졌으며, 그후 1937년까지 127회에 걸쳐 참이 행해졌다. 1937년 이후에는 정치 사회적인 이유로 참 의식이 행해지지 못하다가 1999년 후레 참이 예전대로 복원되어 울란바타르의 강당테그치랭(간등사)에서 행해졌다. ⓒ 몽골교민신문 이안나(울란바타르대학교 한국학 연구소장) 2009.2.6

 

출처 : 사단법인 동북아평화포럼
글쓴이 : ho seung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