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논문은 동덕여대 인문학연구, 제21집, 2013. 12 : 1-31 수록본임. 무단인용을 금함 >
대원제국의 탐라지배와 문화적 영향
이종수(서울스토리텔링연구원장, Ph.D.)
제1장 들어가는 글
고려시대 130여년의 몽골(이하 대원제국과 혼용함)지배는 우리나라에 다양한 방면에서 여러 가지 영향을 끼쳤다(국립제주박물관, 2006 : 121). 특히 13∼14세기 탐라(耽羅, 이하 濟州와 혼용)는 대원제국의 군사적 요충지였다. 제주는 몽골의 기후, 지형과 흡사하다. 그래서 몽골은 탐라의 도명(島名)을 ‘모든 것이 완벽한 곳’이라는 濟州(1273)로 바꾸었다.
일찌기 몽골(Mongolia, 세상의 중심의 의미)은 고려시대 ‘형제국가, 부마국가’로 관계를 맺어 왔다. 한국과 몽골은 민족적 유사성보다는 인종적으로 동일계통에 속해 유사점이 많고, 언어와 풍속에도 관련성이 깊다. 특히 12∼13세기 제주는 원제국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약 100여년 이상 직접 지배를 받았다. 13세기 몽골제국은 세계 최강국이었다. 몽골의 최강의 지배문화가 부마관계로 고려와 직접 통치국(탐라)에 이식, 정착되고 토착화 된 것이다.
이 글은 필자(이종수, 2012.6, a,b,c,d)의 선행연구들에 대한 후속연구물로서 원제국의 탐라지배의 문화적 영향을 사회문화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이 글에서 알아 보고자 하는 것은 원제국의 문화가 탐라지역 문화에 미친 영향(주채혁, 1999 ; 이안나, 2011 ; 고명수, 2011)의 범위를 탐라의 문화적 유습(遺習)을 중심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왜냐하면 고려시대 탐라는 몽골의 직접 지배기간이 가장 길었으며, 그들이 직접 관료를 파견하여 지배하므로서 타 지역에 비하여 몽골문화가 가시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기에 그러하다. 예컨대 1276년 탐라 다루가치가 둔전병(屯田兵)과 주민에게 호마, 우량소 목장을 개설하여 사육하게 하였다(이성우, 1984 : 31). 동시에 탐라의 언어와 습속, 음식 문화 등에 몽골의 문화가 잔존하고 있다. 본 연구의 방법은 13세기 고려에 대한 몽골지배의 선행연구 분석 및 문헌연구와 필자의 선행연구(이종수, 2009 ; 2010 ; 2011 ; 2013)를 참조하고, 기타 학술지 및 사료분석이다. 12∼13세기 몽골 관련 학술지와 논문, ‘몽골비사’ 기록과 ‘원사’, ‘고려사’ 등의 사료를 참조하였다(김상기, 1961 ; 고병익, 1962 ; 장동익, 1990, 1992, 2001, 2002 ; 김혜원, 1994 ; 민현구, 2004 ; 고창석, 1984, 1998; 김동전, 2010 ; 배숙희, 2012, 권영국, 1994 ; 김일우, 2000 : 288). 당시의 대원제국의 문화 특성과 700여년 전 지배자들의 문화현상을 분석하면 현재 제주에서 전승되고 있는 문화현상을 해석할 수 있다는 접근방법이다.
제2장 대원제국의 탐라통치 배경
제1절 지배체제
1. 원나라의 지배체제와 구조
(1) 양익제도와 육사, 달로화적
몽고 고원에서 흥망했던 북방유목민은 그들의 고유한 십진법체제에 기반을 두면서 전체적인 집단의 구조를 ‘우익-중앙-좌익’으로 나눈 양익(兩翼)제도를 통해 정치, 행정체제와 군사, 사회, 경제적 조직을 동시에 운용하는 독특한 유목제도를 유지했다(류병재, 2012 : 357). 몽골도 이를 받아 만호, 천호, 백호 등으로 군사제도를 유지했다.
대원제국의 중앙기구는 정무를 총괄하는 중서성(中書省), 병권을 주관하는 추밀원(樞密院), 출척(黜陟)과 사정(司正)을 담당하는 어사대(御史臺)로 구성됐다(박원길, 2012 : 298). 먼저 황제 직속의 어사대는 관리감찰을 총괄하며, 중서성은 행정을 6부를 통하여 관장하고, 추밀원은 군사를 담당했다.
13세기 몽골은 정복국가 지배를 1) 직접통치, 2) 왕족 분봉 간접통치 3) 국체 인정을 통한 간접 통치 체제였으며, 간접통치 사례가 고려와 베트남이었다(고병익, 1977). 13세기 몽골에 복속된 모든 나라들은 元의 ‘육사(六事)’의 의무조항을 강요받았다(국립제주박물관 : 125 ; 박용운 외 : 183 ; 이익주, 2011 : 79). 이는 원 조정에 왕족을 인질로 보내는 납질(納質), 전쟁 작전에 파견하는 군사, 助軍과 군수물(軍需物)을 조달하는 수량(輸糧), 육로교통망을 있는 역참을 설치하는 설역(設驛), 자국의 인구조사를 보고하는 편호적(編戶籍), 그리고 몽골의 감시관인 달로화적(다루가치)를 설치하는 치장관(置長官) 등이다(박용운 외 : 183 ).
원은 고종 40년(1253) 5차 침입 이후 본격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달로화적을 임명하여 통치하게 한다(권영국, 1994 : 133-134). 삼별초 토벌이후 는 일본원정을 위하여 탐라지배를 적극화한다(권영국 : 134 ; 박원길 외, 2006 : 403).
(2) 정동행성
몽골의 속국 통치구조는 몽골(황제), 지역별 승상, 정동행성(동로군과 정일본행성, 강남군)을 통해서 행해졌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은 원의 11개 지방행정기관으로 지방통치는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통제했다(고병익, 1962).
1274년, 1281년 1,2차 일본정벌 시 정일본행성은 강남군을 지휘하며, 정동행성은 고려왕이 동로군을 지휘한 본부다(모리히라 마사히코, 2011 : 171). 정동행중서성(征東行中書省)은 원(元)나라가 일본 원정을 목적으로 고려에 설치했던 관청이다. 정동행성이라 줄여서 부르기도 했다. 1274년(충렬왕 즉위) 제1차 일본 원정을 시도했다가 불의의 태풍을 만나 실패한 원의 세조(世祖)는 예정된 제2차 일본 원정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1280년에 정동행중서성을 설치했다. 그러나 2차 원정 역시 태풍과 작전의 차질 등으로 실패로 돌아가자 정동행성은 1282년 1월에 폐지되었는데, 그 후 원정이 또다시 추진됨에 따라 1283, 1285년에 복치되었다가 폐지되었다.
1,2차 일본원정 이후에도 제주도, 가덕도, 거제도 등 남해안 일대를 포괄하는 경지체제를 구축하고, 경계망 통괄은 행성에서 주관하고 원에 통보하는 구조였다(모리히라 마사히로 : 173). 일부 고려인과 원제국 관리들은 정동행성, 즉 고려를 없애고 요동지방과 합쳐서 삼한행성(三韓行省)으로 개편하자고 지속적으로 주장하기도 했다(국립제주박물관, 2006 : 126). 이 때 충렬왕 등은 쿠빌라이의 환심을 사서 홍다구 세력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모리히라 마사히코 : 169-170) 고려왕은 ‘부마고려국왕’ 명칭을 획득하여 홍다구 세력을 견제한다. 고려왕은 몽골왕후의 일원(부마), 원 정부의 고급관원(정동행성 승상), 독자 왕국의 군주(고려 왕)였다.
그래서 고려의 정동행성은 국정을 총괄하지 못하고, 고려의 최고정무기관인 첨의부(僉議府)가 治民, 刑政, 收稅 등을 담당하였다(장동익, 1990 : 10). 국왕이 승상직을 겸직하였으며, 左右司의 막료 및 제속사(諸屬司)의 관료들도 대부분 직접 선발하였다. 또 고려 행성에는 부(府), 노(路), 주(州), 현(縣)이 설치되지 않았으며 달로화적과 제형안찰사(提形按察使) 등도 없었다.
2. 지배구조
(1) 다루가치 임용과 둔전병 배치
<<원사>>본기에는 세조(1260-1294) 관련 42건, 성종(1295-3007) 관련 20건이 기록됐다(장동익, 2001 : 680-736). 원의 ‘병지’(兵志)에는 탐라목마장과 고려 둔전, 응방 등의 기록이 전한다. 탐라와 東嶺路總管府, 동녕부, 심양등로고려, 탐라, 탐라국, 탐라국군민안무사, 손탄, 실리백 등과 관련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총관부는 정동행성 소속이다. 탐라국에는 노에 해당하는 관리를 두었다(김구진, 1989 : 88-89). 탐라총관부는 대원제국이 직접 다루가치 등을 파견하여 지배하였으니 탐라총관부는 ‘要衝의 地’, 곧 특수행정구역에 해당했다(고창석 : 22).
총관부의 다루가치(원관료)를 중심으로 총관은 탐라성주가, 집행은 屬官(향리)들이 맡았다. 탐라물자 수탈의 책임은 다루가치가, 집행은 속관층에서 맡은 것이다. 전함 건조주체는 백성, 작업의 집행은 토착세력과 속관이 주도했다(김일우, 2000 : 303-304). 원은 탐라민의 동원에 대한 포상과 회유, 군사동원 근거로 金牌 등을 수여했다.
1273년 여몽군의 삼별초 토벌 이후 원은 본격적으로 군을 주둔시킴과 동시에 둔전(屯田)을 설치한다. 명분은 일본원정에 필요한 군량의 확보라고 하나 실은 고려 조정과 군대를 감시하기 위한 조치였다(권영국, 1994 : 134-136). 제주에도 500명의 원군을 주둔시켰다(고려사절요, 1권 19, 원종 14년 4월). 특히 원은 군의 발령권(發令權), 발병권(發兵權), 장병권(掌兵權)을 장악하고, 군기(軍器)도 철저히 통제한다. 만호부의 만호, 부만호 임명권도 행사한다. 탐라 둔전군은 둔전경략사(김구진, 1989 : 87)에 속한 군인들이다. 탐라국초토사에 鎭邊軍 1,700을 주둔시켰다(<<원사>> 권208, 열전 95 탐라전).
쿠빌라이는 노총관부의 관원을 임용함에 각 노(路)에 몽골인, 한인, 색목인 등을 병용하라고 하고, 지원(至元) 2년에 조서를 내려 몽골인으로 각 로의 다루가치를 삼고, 한인으로 총관을, 회회인으로 동지(同知)에 충원하라고 명했다. 다루가치는 감치관(監治官)의 인신(印信)을 관장하고, 총관보다 지위가 높았다. 보통 정3품에 해당된다. 총관은 “判署”를 관장하고, 賦役과 詞訟의 일체 정무를 처리하는 데, “管民長官”이라고 했다. 同知, 治中, 判官, 推官은 모두 좌이관(佐貳官)으로, 총관이 정무를 처리하는 것을 도와준다(배숙희, 2012 : 104).
몽골은 1273년 삼별초 토벌 후 탐라국초토사(고창석, 1984 : 382 ; 배숙희 : 97), 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 군민안무사, 고려환부 탐라총관부, 군민만호부를 설치하여 실리백 등을 임용한다(배숙희 : 97). 탐라 다루가치 손탄(배숙희 : 99)은 탐라에 파견된 첫 인물이다.
몽골관리의 탐라 임용 사례를 < 표 1 >에 제시한다.
< 표 1 > 몽골관리, 관원 등 사례
년대 |
관부 |
관직과 관원명 |
비고 |
출처 |
세조 至元 10년(1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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耽羅國招討司 |
昭勇大將軍(정3품) 초토사 失里伯 |
오지 않음 |
譯註 元高麗記事 |
초토부사 윤방보(漢人) |
漢人 | |||
지원 12년(1275) |
軍民都達魯花赤總管府 |
다루가치 孫攤 |
임직 불명확 |
元史 권 63. 지리지 6 |
지원 13년(127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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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가치 塔刺赤(來) |
실리백 아들 |
고려사 권 28, 충렬왕세가 |
지원 21년(1284) |
耽羅(國軍民)按撫使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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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史 권세조본기 10 |
按撫使 忽都塔兒 | ||||
지원 24년(1287)1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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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가치 塔刺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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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 30 |
지원 29년(1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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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승 阿撤(來) |
다루가치의 문책차 래도 |
고려사 권 30, 충령황 19년 |
지원 30년(1293)9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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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가치 탑자아(去) |
교지(交趾)로 유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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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가치 阿撤(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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成宗 元貞2년(1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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斷事官 木兀赤(임명) |
목축일을 관리하기위해 옴 |
高麗史 권31, 충렬왕 22 |
성종 대덕4년(1300) |
탐라총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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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권31, 충렬왕 27 |
성종 大德 5년 (1301) |
耽羅軍民萬戶府(耽羅軍民總管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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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행성 소속 |
元史 권 63, 지리지 6 |
萬戶 李莊 |
泰安李氏 시조 | |||
至大 원년, 13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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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루가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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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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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匡靖大夫都僉議評理上護軍, 다루가치 朴景亮 |
고려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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惠宗 元統원년(1333)3월 |
耽羅國軍民按撫使 |
다루가치 노열니타(奴列你他)(來) |
탑자적의 아들 |
元史 권38 순제본기 |
혜종 至正 22년( 1362) |
耽羅萬戶府 |
(副樞) 文阿旦不花가 整治事에 임명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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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라지 권1 |
출처 : 배숙희(2012 : 106-107), 고창석(1998), 장동익(2001).
(2) 교통체제
원은 종속세력에 대한 정례(定例) 요구로 ‘육사’에 의거 고려에 잠치설치를 요구한다(모리히라 마사이코 : 183). 의주-개경-합포-나주-탐라(제주) 노선이다. 이 잠치는 원과 고려정부, 전선의 연락, 병경 수비의 기반이었다. 몽골둔전병(둔전병)은 10개 처에 각 둔전마다 용군(用軍)이 500명 가량이었으며, 경락사가 주관하였다(박형표 : 78). 삼별초 정벌시에는 둔전군, 한군(漢軍), 무위군, 고려군 등 모두 하여 1만 2천여명이었다(고창석, 1998 : 460).
‘잠치(站赤)’로 불렸던 ‘대몽골제국’의 역전제도(驛傳制度)는 유라시아 대륙을 아우르는 제국의 안정적인 경영을 위한 필수적인 장치였다. 역참(驛站)이라는 표현은 잠치의 중국식 표현이라 할 수 있는데, 30여 년간 지속된 고려 최씨정권의 대몽항쟁이 종료되면서 몽골과 고려 사이에는 화친의 논의가 이루어졌다(정요근, 2007).
역참의 설치는 원(元)이 화친 성립의 조건으로 고려에 요구했던 6사(六事) 중의 한 항목이다. 따라서 몽골제국의 적통이라 할 수 있는 원은 당연히 화친의 조건으로 고려에 원의 관리들이 공식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역참의 완비를 요구하였다. 고려는 일찍부터 개경(開京)을 중심으로 하는 독자적인 역제(驛制)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원과의 화친과 함께 원의 요구를 수용하면서 고려의 역로망(驛路網)은 원의 잠치체계와 밀접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실제로 원은 6사 이행의 하나로서 개경으로부터 원의 대도(大都) 방면과 연결되는 루트에 위치한 역참들을 신속히 재건하도록 하고, 역 이용자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포마차자색(鋪馬箚字色)이라는 관서를 설치하게 하였다. 그리고 원 세조는 고려에 직접 토드코순(脫脫禾孫)이라는 감찰관을 임명하기도 하고, 수역(水驛)을 설치하여 운영하도록 하였으며, 수차례 사신을 파견하여 고려 역참을 검열하게 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개입과 간섭을 시도하였다. 원은 고려와의 화친을 통해 고려에 불개토풍(不改土風)의 원칙을 약속한 이상, 원칙적으로 고려의 내정에 직접적인 개입을 강화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직ㆍ간접적인 개입의 배경에는 일본원정이나 미곡(米穀)의 장거리 해상운송 등 고려가 매개되어야 하는 원의 국가적 사업이 자리잡고 있었다.
탐라 다루가치는 충렬왕 4년에 이미 나주, 해남 방면에 역참을 설치해 운영하고 있었다(김일우, 2000 : 293). 탐라에서 거두어들인 물자의 원제국 수송을 위해 운영된 것이다(김일우, 2000 : 299). 탐라와의 연결로는 해로(水驛)였다. 해상잠치(水站)는 물자의 대도(大都) 수송용이었다. 제주도-> 한반도 서안->직고항로였다. 잠치는 약 40여개가 있었다가 20여개로 줄어든다. ‘천하참명(天下站名)’에 의하면 의주-> 개성-> 합포 노선과 나주-> 탐라노선 등을 확인할 수 있다(모리히라 마사히코 : 185-188).
동정원수부(東征元帥府)의 토드코순(脫脫禾孫) 설치 시도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원정을 준비하기 위해 원에서 설치한 일개 관부조차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고려의 역로망을 통제하고자 하였다. 이는 원의 일본원정에 고려가 전초기지로 기능하고 있는 이상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구조적인 문제이기도 하였다. 고려 역로망 운영에 대한 원의 직접개입은 2차 일본원정의 시기와 1290년대 강남과 고려, 고려와 요동 사이에 대량의 미곡이 운송되었을 때에 보다 명확히 나타났다. 수역 설치의 주목적은 원의 국가질서를 유지하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고려 역로망이나 고려에 신설된 수역체계 등은 기본적으로 원의 임박한 국가적 당면목표의 실현과 관련될 때에 원의 보다 강력한 간섭과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원의 간섭과 개입은 철저히 원의 당면한 국가사업과 관련되었기에, 더 이상 원의 이해관계와 부합하지 않을 때에는 즉시 폐기되었으며, 그와 관련된 고려의 사정은 거의 배려되지 않았다(정요근, 2006).
제2절 사회변화의 원인과 결과
1. 몽골 군사주둔과 관료 파견
몽골후손들은 제주가 몽골의 영향 하에 있던 13∼14세기에 제주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당시 제주지역사회에는 ‘호첩(胡妾)앞인가 기어다니게’할 정도로 그들의 횡포가 심했다(김동전, 2010 :315). 그들은 주로 군사적 측면의 직역을 맡았다. 19세기 중, 후반까지 대원본관을 유지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지속시켰다. 이후 조선시대 중앙정치인들의 제주유배와 그들의 후손들이 새로운 ‘來姓’이 되면서 대원 본관 성씨를 대체해 나가게 된다(김동전 : 315).
세조는 고려를 병참기지로 삼고, 일본 원정을 위한 둔전병(屯田兵)을 배치했다(이성우, 1984 : 31). 원은 병사들에게 필요한 농우 6천두를 원종 12년(1271)에 요구했으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자 그들의 목축기술을 이용하기 위하여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했다. 이후 양과 소, 말 등의 도살법과 요리법이 고려인들에게 전래되어 고려인들도 쇠고기를 먹게 되었다. 불교의 영향으로 살코기를 제대로 먹지 않았던 고려인들이 몽고지배에 들고나서는 담(膽)과 같은 내장이나 갈비고기 등을 즐기게 된다(이성우 : 33).
그런데 맥족은 유라시아 초원에서 훈채(葷菜)인 부추, 마늘, 두장(豆醬) 등을 조미하여 장에 담갔다가 구운 불고기를 만들어 먹었다. 너비아니, 불고기류다(이성우 : 27).
2. 관료, 목호 등의 본관 사례
30여 년 동안 몽골장수와 군인, 고려 왕실과 장군, 군인과 백성들의 주식 패턴과 군량의 조달과정을 통하여 몽골음식의 특성과 고려에 미친 몽골지배의 사회, 문화적 영향을 중심으로 주요 내용을 분석한다.
원나라 세조는 일본정벌의 기지로서 탐라를 중요시하여 1272년 8월 고려에 사신을 보내 탐라의 삼별초를 적극 공략토록 촉구했다. 결국 삼별초는 고려 원종 14년 (1273년) 음력 4월 고려와 원의 연합군에 무너지면서 완전 평정된다. 그리하여 제주도는 원나라에 귀속되며, 또한 일본 정벌 준비라는 군사적 목적 및 목재 징발과 말의 수요 충당을 위한 경제적 이유 등으로 목마장이 설치된다.
탐라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관원, 주둔군, 목인(하치), 유배인 등이다(배숙희 : 106-113). 이들이 탐라에 정착하게 된 배경(김동전 : 304-305)은 관부설치, 진수군 주둔(鎭守軍 駐屯), 목마장 설치, 중국인 유배지, 원의 황족 유배지, 몽골군사 일부 정착 등에 기인한다. 대표적으로 ‘大元’본관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몽골 지배기 탐라에 래도(來島)하여 정착한 이들이다(김동전 : 310).
그 관료(다루가치)와 진수군이란 명목하에 몽골군의 일부를 탐라에 주둔시키는 과정에 이들과 목마장의 목호들이 래도(來島)한다. 이들 본관이 ‘대원(大元)’이다. 또 죄수와 운남 왕족도 유배시켰다(김동전 : 304-305). 탐라 진수군은 약 2,000여명 이내였다(고창석 : 391). 탐라의 상애떡은 몽골 목마장 관리들이 간식으로 먹던 몽골식 떡이었으며, 현재까지도 북제주군 일대에 원형이 남아있다. 이들이 먹었던 음식이 상애떡, 순대, 슐랭(설렁탕), 소주 등이다.
(1) 좌씨(左氏)
원나라의 천관시랑(天官侍郞) 좌형소(左亨蘇)는 청주 좌씨의 시조인 좌구명(左丘明)의 67세손인데 충렬왕(재위 1274~1308) 초기, 사적으로 보면 충렬왕 원년인 1274년경 탐라총관부에 목마장이 설치되면서 감목관으로 부임했다. 한국 좌씨의 제주도 입도 시조로서 청주좌씨 세보에는 중조 또는 중시조라 칭한다. 중국 산동성에 거주하였는데, 부친인 좌성보(星輔)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개봉(開封) 사람으로 원나라의 천관시랑을 지냈으며 좌구명의 62세손인 송나라 황주(黃州)자사(刺史)를 지낸 좌헌(憲)의 후예다.
제주는 탐라총관부가 폐지되어 고려에 반환된 후에도 감목관 및 목호의 지배 하에 있다가, 최영이 공민왕 23년(1374년) 8월 목호의 난을 진압한 이후 고려의 속현으로 편입된다. 이때 제주도 입도 좌씨의 5세조 좌한기(漢棄 : 한, 즉 중국을 버린다는 뜻)는 좌형소 이후 후손에게 세습되던 감목관직을 고려에 반납하고 고려에 귀화하며 고려인으로 생활기반을 잡고 정착한다. 좌구명의 67세손인 좌형소가 1274년 제주도에 입도한 후 100년만인 1374년 비로소 한국인으로서의 좌씨 성이 출현했다.
제주의 左혜정은 “바로 우리 조상이 원 지배기에 제주도에 들어 왔다”고 했다(허용범, 1998 : 515). 중국 산동성의 청주(淸州)가 본관이다. 지금도 제주도 서쪽에 좌씨가 모여 산다. 좌가장(左哥場)이라 좌씨들이 관리하던 목마장이 제주도 동쪽에 있었다. 구좌읍에 좌씨 뿌리가 있었다. 몽골 목마장인 수산평(首山平)과 근접거리다. 이처럼 2013년 현재 좌씨 후손들이 제주에 거주하고 있다.
강씨 24명 좌씨 7명 등이었다. 많은 몽골인들이 제주에 잔존하여 제주인들과 동화되었다(김동전 : 313-323). 대원 강씨에서 진주 강씨로 본관을 바꾸며 적응한다. 제주 지역에 남아있는 몽골족의 본관(성씨)사례를 예시한다(< 표 2 > 참조).
< 표 2 > 탐라의 ‘대원’ 본관
시기 |
성씨 |
마을 |
비고 |
자료 출처 |
가경 12년(1807)- 동치9년(1870) |
姜奉朱 姜順完, 姜德朱 등 다수 |
今勿路里 |
本 大元 |
제주 대정현 사계리 호적중초(1) |
도광 11년(1831)- 도광26년(1846) |
佐世好 |
〃 |
〃 |
〃 |
가경12년(1807) |
姜渭興, 姜友安 |
하원리 |
〃 |
제주 하원리 호적 |
도광24년(1844)- 동치3년(1867) |
佐久太(允泰,中宅) |
동성리 |
〃 |
보성리 마을회관 소장(미간행) |
도광8년(1828)- 동치6년(1867) |
姜位奉(遇逢, 渭逢) |
동성리 |
〃 |
〃 |
함풍5년(1855)- 동치9년(1870) |
徐元用 |
동성리 |
〃 |
〃 |
가경12년(1807)- 함풍11년(1861) |
姜仁敏 처 姜召史 등 |
대포리 |
〃 |
대포리마을회관 소장 |
가경5년(1800)- 함풍11년(1861) |
肖有信 |
하모슬리 |
本 大國 |
제주하모슬리 호적중초 |
姜世弘,姜碩, 姜得根 |
〃 |
본 대원 | ||
佐世好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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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무 |
덕수리 |
해당무 |
제주 대정현 덕수리 호적중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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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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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천리 호구 단자 |
출처 : 배숙희(2012 :116).
(2) 탐라(제주)의 성씨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38 제주목 성씨조를 보면 원에서 온 성씨는 趙, 李, 石, 肖, 姜, 鄭, 張, 宋, 周, 秦 씨 등이다(국립제주박물관, 2006 : 116)( < 표 3 > 참조). 이들은 모두 몽골 군인 후손들이었다(허용범, 1998).
< 표 3 > 제주의 성씨
濟州 4姓 |
來姓 |
大元 |
雲南 |
資料 | ||
土姓(3姓) |
高氏 사위 |
屬縣姓 |
來姓 | |||
高,梁,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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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지리지 |
〃 |
文 |
鄭,金,李,文安,玄,咸,楊 |
金,李,朴,林,兪,周,趙,宋,鄭,洪,徐,崔,吳,車,池, 韓,馬 |
趙,李,石,肖,姜,鄭,張,宋,周,秦 |
梁,安,姜,對 |
신증동국여지승람 |
〃 |
〃 |
〃 |
金,李,朴,林,兪,周,趙,宋,鄭,洪,徐,崔,吳,車,池,馬,黃,白,南,牟,許,張,林,邊 |
〃 |
〃 |
탐라지(이원진) |
〃 |
〃 |
〃 |
金,李,朴,林,兪,周,趙,宋,鄭,洪,徐,崔,吳,車,池, 韓,馬 |
〃 |
〃 |
남환박물(이형상) |
〃 |
〃 |
鄭,金,李,文安,玄,咸,楊,朴,林,兪,周,趙,宋,洪,徐,崔,吳 ,車,池,韓,黃,白,南,牟,許,張,任,邊,佐,肖,姜,康,秦,孔,秋,奇,皇甫,具,呂,睦,朱,權,尹,元,咸,裵,孫,丁,沈,盧,劉,柳 ,千,禹,表,田,全,曺,郭,申,愼,河 |
제주 대정정의읍지 (1793) | |||
〃 |
〃 |
鄭,金,李,文安,玄,咸,楊,朴,林,兪,周,趙,宋,洪,徐,崔,吳 ,車,池,韓,黃,白,南,牟,許,張,任,邊,佐,肖,姜,康,秦,孔,秋,奇,皇甫,具,呂,睦,朱,權,尹,元,咸,裵,孫,丁,沈,盧,劉,柳 ,千,禹,表,田,全,曺,郭,申,愼,河,魏,賓,對 |
탐라지 초본 (이원조) |
출처 : 김동전(2010 : 308).
3. 몽골족의 정착과 제주 여인들과의 혼인
고려에 왔던 몽골군 중에는 원이 고려 여자와의 혼인에 관한 지침을 하달할 만큼 고려 여인과 혼인했던 자가 적지 않았다(고려사, 권29, 충렬왕 6년 10월조). 원제국시 탐라 몽골족들은 명나라가 개국하자 제주여인들과 혼인하여 점차 제주인으로 동화되었다(김동전, 2010 : 310).
1254년 황해도에 주둔했던 1,400여 명의 몽골군은 모두 고려 여성을 아내로 삼았고, 함께 원나라로 갔다(김광언 외, 1993 : 243-245). 당시 결혼도감, 과부처녀추고별감 등이 설치될 정도였다. 1262년 강화 후에는 원정부는 노골적으로 양가의 처녀를 요구했다. 1275년 10명이 떠난 것을 시초로 이후 80여년 간 엄청난 수의 고려 여성이 원나라로 갔다. 약 2만여 명이 된다.
제3절 선행연구와 분석의 틀
1. 선행연구 분석
주요 선행연구로서는 먼저 김상기(1961)의 고려사 연구와 국립제주박물관(2006)의 몽골의 역사와 문화, 김일우(2005)의 고려, 탐라사 분석, 이종수(2010 ; 2012)의 탐라의 몽골문화 분석, 고창석(1984)의 려,원과 탐라의 관계, 고병익(1962)의 려대 정동행성, 고병익(1977)의 고려와 원의 관계, 김동전(2010)의 조선 후기 대원 본관분석, 배숙희(2012)의 대원후손 분석, 이종수(2008, 2009, 2010, 2011, 2012, 2013)의 안동 소주 스토리텔링, 안동음식문화, 탐라와 몽골의 음식문화 등 등을 제시할 수 있다. 원제국의 탐라지배의 문화적 영향 분석연구는 아직 일천한 실정이다.
< 표 4 > 선행연구와 본 연구의 차별성
구 분 |
선행연구 분석과 차별성 | ||
연구목적 |
연구방법 |
주요 연구내용 | |
몽골의 지배체제와 탐라 문화 |
김상기(1961), 고려사 연구 |
사료분석 |
고려사 개관 |
김일우(2005), 고려시대 제주사회 변화 |
사료분석 |
탐라사연구 | |
김동전(2010), 조선 후기 제주거주 몽골족 가문사례 분석 |
사례분석 |
탐라의 몽골본관 분석 | |
고병익(1999), 고려와 원과의 관계 분석 |
사료분석 |
정동행정연구 | |
고병익(1962) 정동행성 |
사료분석 |
정동행정 연구 | |
고창석(1982), 고려전기 탐라군현 설치 분석 |
〃 |
고려의 군현연구 | |
고창석(1998), 원관련 고려기사 분석 |
〃 |
원제국기 고려문헌 분석 | |
고창석(1984) 려,원과 탐라관계 분석 |
〃 |
원과 탐라관계 분석 | |
국립제주박물관(2006), 원과 탐라관계분석 |
〃 |
원과 탐라관계 분석 | |
김기선(2008), 한,몽 교류사 분석 |
질적 분석 |
한,몽관계 연구 | |
배숙희(2012), 원나라의 탐라 통치와 자취 |
사료분석 |
몽골지배의 문화적 흔적 분석 | |
이종수(2012.6a). 탐라와 몽골의 음식문화분석 |
질적분석 |
탐라음식문화의 연원 분석 | |
이종수(2012.6b), 탐라와 몽골의 음식문화비교 분석 |
질적 분석 |
탐라와 몽골의 문화적 특성 | |
본 연구의 차별성 |
몽골지배와 탐라(고려)에 미친 영향분석을 目的으로 함. |
질적 분석 |
여몽 일본원정 전후 대원제국의 탐라에 미친 영향과 시사점을 분석함. |
2. 분석의 틀
12∼13세기 팍스몽골리카와 그 관리, 이주자들의 지배지에 대한 행정문화적 영향 등을 석한다. 그 130여년의 지배장소 탐라에서 몽골 문화적 잔재들을 확인할 수 있으며, 제국의 지배체제와 방식 등의 실제 사례를 분석하고자 한다. 문화 이입 분석의 변수는 지배 주체, 제도, 몽골 문화습속 등 등에서 찾아 유추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 표 5 > 분석의 틀
국가지역별 |
독립, 종속변수 | |
독립변수 측면 |
종속변수 측면 | |
몽골과 탐라(고려) |
- 팍스 몽골리카 - 몽골의 세계정벌과 ‘육사’ 다루가치, 탐라총관부(路行政) |
- 사회문화 습속 - 음식문화 |
제3장 대원제국 문화의 특성과 탐라 전래
제1절 몽골의 지배구조와 문화적 특성
1. 탐라의 노행정 구조
(1) 총관부와 노행정
몽골의 속국 통치구조는 몽골(황제), 지역별 승상, 정동행성(동로군과 정일본행성, 강남군)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정동행성(征東行省)은 원의 11개 지방행정기관이었으며, 몽골의 지방통치는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통제했다(고병익, 1962).
중서성 밑에 영북, 정동 등 11개 행성이 있었다(김혜원, 1994 : 41 ; 이개석, 2007). 이들 행성은 세조대까지 모두 路 185, 府 33, 州 359, 군(軍) 4, 按撫使 15, 縣 1,127을 관장하였다. 원은 1273년 삼별초 토벌 이후 탐라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고, 노행정(路行政)을 실시한다. 원나라의 탐라 통치는 내지의 변원지역과 비슷한 행정시스템을 도입하면서도 탐라의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한 대원제국의 직접통치 지배체제였다(배숙희 : 105).
한편 고려는 충렬왕 26년(1300)에는 제주에 동,서도현(東西道縣)을 설치한다(김일우 : 266). 대촌에는 호장 3인, 성상 1인, 중촌에는 호장 3인, 소촌에는 1인을 두었다. 행정단위(구역)는 주현인 제주목, 15개 속현구조다. 읍사(邑司)와 향리가 신설된다. 이것은 동서아막을 기준으로 몽골국립목장을 중심으로 구성된 것으로, 국립목장 때문에 제주사회의 경제력과 인구 등의 규모 확대가 이루어진다. 제주목과 동편의 성의현, 서편의 대정현으로 현재의 모태가 된다(김일우, 2005 : 267). 속관으로 판관, 사록감군사, 장서기, 법조, 문사 등이 있었다. 읍사(邑司)에서 향리들이 행정실무를 처리했다.
2. 탐라의 전략기지화
여몽군의 일본원정 용 전함(戰艦)과 전마(戰馬) 부담측면이다. 元은 이미 1273년에 3년간이나 抗戰한 江華島守護軍 三別抄를 평정하여 高麗를 完全 정복하여 예하(隸下)에 두고 있을 때였다. 격분한 元의“쿠빌라이”는 일본원정을 최종 결심하고 74년1월 樹木이 별로 많지 않은 半島國家 高麗로 하여금 日本遠征을 위한 造船을 명했다. 大船 3백, 輕疾舟가 3백, 汲水船3백 모두 9백쌍(艘)을 만들도록 명한 것이다. 元에의 抗戰으로 피폐해진 고려로서는 죽음과 다름없는 명령이었다. 고려는 쿠빌라이의 전함 1千艭 건조지시에 일본원정기지로 전환한다(박형표 : 67).
군사와 군비부담(국립제주박물관 : 126)측면을 보면, 충렬왕은 “신으로 하여금 일본원정케 하소서”(고려사절요 권 20)했다. 고려에 대해 즉시 전쟁준비를 독촉하는 가운데, 1279년(충렬왕5년) 南宋을 멸하고 그 여세를 몰아 일거에 일본의 항복을 받고자 征東行中書省 이란 官府를 고려에 두고 忠烈王을 中書左丞相行中書省事라는 元의 職名으로 수여하고 일본정벌에 대한 사명완수를 명했다. 이에 충렬왕은 兵船 9백쌍(百艘), 梢工水手(배 만드는 匠人) 1만5천명, 正軍1만명, 兵糧11만 漢石 기타 집물, 기계 등을 부담할 것을 元主에게 약속했다. 충렬왕 6년 5월에는 탐라에서 조선용재(造船用材) 30쌍분((艭分)(고창석, 1984 : 378)을 공급해 왔다. 탐라는 당시 戰艦 修理場이었다. 고려 관료들의 전마(戰馬) 供出, 주정(酒精) 공출은 몽골군 소비품의 재원부족 충당분들이다. 전함병량도감(戰艦兵糧都監)(박형표 : 81-87)에서 戰艦管理와 兵糧 수급 업무를 도맡았다.
탐라에서 군선도 건조했다. 충렬왕 7년 2차 정벌시 탐라에서 건조한 선박이 홍다구에게 전달된다. 2차 실패 후에도 탐라를 3천척의 대선선박 건조에 참여시켰다(고창석, 1984 : 378 ; 고창석, 1998 : 453-454). 1269년에는 추밀원 관리를 흑산도와 탐라에 1,2차에 파견하여 현지를 시찰시켰다(고창석, 1998). 전함건조 시찰과 몽골관리들의 열병을 포함했다(박형표 : 68).
3. 목마장 운영
대원제국은 삼별초를 평정한 뒤 달로화적도감(달로화적도감)을 설치하고, 몽골식목장을 설치하여 목축정책을 추진하였다(高麗史 卷 57 志 11 地理 2 耽羅縣條). 목장은 마장(馬場)을 가장 중시했으며 원은 목호에게 직접 관리하게 하였다(남도용, 1969 : 681).
충렬왕 13년에는 축마별감(畜馬別監)이란 관직을 만들어 수시로 제주에 파견하였다(高麗史, 卷 82 志 36 兵地 2).
< 표 6 > 대원제국의 목축정책 사례
년대 |
전래자 |
유형 |
출처 |
忠烈王 2년 8 |
塔刺赤 |
馬 160匹 |
高麗史 卷 28, 世家 28 |
〃 3년 12 |
禿哥 등 18인 |
馬 30, 狗 150필 |
〃 |
〃 3년 正丑 |
塔羅赤牛 |
牛, 馬, 駱, 驢, 羊 |
東國輿地勝覽 38 濟州牧條 |
〃 4년 2 |
塔刺赤 |
海東靑 |
高麗史 卷28 |
? |
|
鹿 |
世宗實錄 卷 52 |
〃 26년 |
奇皇后 |
鹿, 馬 |
世宗實錄 卷151 |
출처 : 남도영(1969 : 681)
1276년 충렬왕 2년 몽골의 말을 제주에 방목한다(김일우 : 251). 성산 수산리(성산평)와 한경 고산리(고산평, 차귀) 아막(牙幕)에서 몽골의 전마를 충당하게 되며, 몽골의 ‘하치(牧胡)’가 사육했다. 제주도에 왔던 하치들은 몽골족의 방목방식과 제주도의 방목방식을 절충했다. 제주민과 그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말이 크게 번식해 산야에 가득했다고 한다. 당시 제주도 인구는 대략 3만여 명, 말도 2-3만 필이었다(김일우 : 211 ; 박용운 외, 2002). 탐라는 몽골제국의 14개 국립목장 증의 하나였다. 충렬왕 20년(1294) 경에는 몽골인들이 약 1,500여명에 이르렀다(김일우, 2005 : 258). 이곳에서 일하던 몽골인들과 제주 여인들의 혼인이 일상화된 계기가 된다. 유목민인 원제국과 몽골문화의 급속한 이입이 이루어졌다.
한편 현재적으로 제주와 몽골의 연관성은 말(馬)에서 찾을 수 있다. 13세기 전후 3만여 필에 달하던 제주의 조랑말은 현재 500∼600필 정도에 그치고 있다. 몽골어 ‘모르’가 제주어 ‘몰(馬, 말)’로 정착된다(허용범 : 519).
말의 용도는 戰馬, 驛馬, 외교, 농경, 농민 대여 등이었다(남도영, 1969). ‘산장구마(山場駒馬)’에 보면 산장점마인이 3,536명이나 되었으며, 말관리 구조는 목사, 판관과 정의현감(감목관), 마감과 우감, 군두와 군부, 목자(테우리) 등이었으며, 50필 단위로 2명의 牧子가 사육했다. 산마장(목장), 백중날 떡, 밥, 술 등 제물로 ‘테우리동산’에서 고사를 지냈다.
제2절 몽골의 음식문화
1. 음식특성
13세기 몽골 지배영역이 확장되면서 동서문화 교류의 확대 및 상호간 영향이 증대된다( (김천호, 2003 : 184-198). 몽골족의 ‘몽골비사’에 나오는 음식 중요도는 1) 마유주 2) 양고기(슐랭), 제사(음식) 등이 기록되어 있으며, 13세기 음식의 특성과 오늘날의 음식패턴과의 연관성을 유추하게 하는 단서가 된다.
동북아 유목민들 중 만주족, 몽골족들은 한식과 유사성이 많다. 짐승의 고기를 통째로 끓여 탕과 백숙을 즐기거나 소금으로만 간하고, 국, 밥, 떡류의 발달, 돼지고기 선호, 순대 문화 등이 그것들이다(김천호, 1999.12 : 64-66).
몽골의 대표음식은 오츠(김천호, 1997 : 161), 보도크와 호르호크, 볼츠(육포), 게데스, 보즈, 고르두다이 호-르(밀가루 칼국수) 등이다. 13세기 이후 2000년 현대까지 몽골은 의식주 패턴을 전통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음식도 차강이데와 올랑이데를 유지한다(연정열, 1999 : 98).
첫째 국(sulen)문화다. 거세한 2년생 양고기는 맛있고 국물도 일품이다. 뼈, 내장, 고기 등을 통째로 넣고, 끓여 먹는다. 우리의 설렁탕과 같다. 슐랭은 몽골인들의 아침 주식이다(김천호, 2003 : 193-195). 뼈, 내장, 고기 등을 통째로 넣고 끓이는 조리법이 동일하다(몽골비사 124절). 아침식사를 고기국물인 슐렁이라고 할 정도로 유목민들에게 아침에 먹는 뜨거운 탕이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김천호, 195 ; 몽골비사 192절). 슐랭은 몽골인들의 아침 주식이다(김천호, 2003 : 195). “두 살난 거세양으로 국을 만들어 아침에 안 모자라도록 하겠습니다. 밤참에 안 늦도록 하겠습니다. 얼룩박이 암양들을 길러 수레밑에 가득하게 하겠습니다”(몽골비사 중, 유원수 역주, 2004 : 87-88). ‘몽골비사’ 229절에는 중세 몽골인들이 슐렝으로 아침식사를 한다는 기록이 나온다. 소금으로만 간한다(박원길, 1999 : 116). ‘몽골비사’ 124절에는 칭기스카칸은 엉구르, 수이게투-체르비, 카다얀-달도르칸 3인에게 말하기를 “새벽의 마실 것과 음식을 결핍되지 않게 하며,” 데게이가 말하기를 “두 살난 거세양의 국(šűlen)을 잘 끓여 새벽의 음식물이 부족하지 않게 할 것이며, 숙박지에도 그 운반이 뒤처지지 않도록 하겠습니다”(박원길 외 : 132)라고 기록했다.
탕 문화와 관련, 우리나라의 곰탕과 설렁탕은 조리법은 같으나 “설렁탕은 뼈 국물이고, 곰탕은 고기국물이다.” 뼈를 고아서 만든 것이 설렁탕이고, 고기로 국물을 낸 것이 곰탕이기 때문에 설렁탕은 국물이 뽀얗고, 곰탕은 국물이 맑다(농림수산식품부, 2012.12 : 78).
무쇠솥에서 펄펄 끓여낸 설렁탕 뽀얀 국물에 새콤한 깍두기 국물을 부어 먹는 맛은 그야말로 별미다. 1920년대 대중잡지인 별건곤(別乾坤)에서는 “기름기가 둥둥 뜬 둑배기 하나와 깍두기 접시가 앞에 놓인다. 파 양념과 고춧가루를 많이 쳐서 소금으로 간을 맞추어 훌훌 국물을 마셔가며 먹은 맛이란 도무지 형언할 수 가 없으며 비할 수가 없다(농림수산식품부, 2012.12 : 71).
둘째, 마유주문화다. 몽골족의 ‘몽골비사’에 나오는 음식 중요도는 1) 마유주 2) 양고기(슐랭), 제사(음식) 등이다. ‘몽골비사’에는 마유주와 양고기 이야기가 가장 많이 실려 있다(김천호 : 199).
셋째, 구이보다 찜을 즐긴다. 몽골인들은 양고기 탕, 백숙 등 찜을 선호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슐랭을 먹는다. 탕은 주로 소의 각 부위를 이용하고 통째로 끓이는 방법을 쓴다. 장국, 곰탕, 소머리탕, 선짓국, 족탕 등이 그 예이다. 또한 백숙과 찜도 즐겼다. 순대는 양과 염소의 장을 쓴다는 점이 한국과 다르다. 몽골의 설렁탕은 대형 가마솥에 소 2마리, 양이나 염소 12마리를 통째로 끓여 소고기를 잘게 썰어 고금을 넣고 끓이는 공탕(šűlen)이다. 공탕은 전쟁터에서 군사(특히 기마병)들의 식사를 해결하는 유용한 수단이었다(이종수, 2010.3). 제주의 몸국은 경조사가 발생했을 때 지역과 친족 공동체들이 모여 일을 치루면서 ‘함께 나누어 먹는 공식(公食)’이었다.
몽골의 공탕선호는 ‘몽골비사’에도 자주 나온다. 고기를 끓인 국물로 탕문화이다. 설렁탕은 ‘맛있는 고깃국’이라는 중세 유목문화의 특성과 몽골식문화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어휘다(김기선 : 195-197).
넷째, 군인들은 굽기를 선호했다(김천호, 2003 : 199). 편리해서다. 대표적인 것이 전세계를 공략하면서 먹었던 꼬치구이, 바베규(버덕), 순대와 소시지, 보르츠 등 등이다. 전 세계에 걸쳐서 가장 널리 먹는 음식들 중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징기스칸이 전 아시아와 유럽 일부를 제패하면서 생겨난 음식이다. 특히 한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한 음식 및 유럽에서도 즐겨 먹는 음식들 중에는 몽골 제국의 군사식량에서 유래한 음식이 많다.
몽골군대의 야전 식량은 햄버거, 꼬치 구이, 바비큐, 순대와 소시지, 피클 등이 있었다. 순대와 소시지는 몽골(제국)군인의 ‘야전도시락’이었다. 야채가 귀한 몽골제국군들은 내륙에서 약탈한 야채와 짐승을 도축하여 순대를 만들었다. 몽골군이 남긴 음식문화는 육포(보르츠), 육회(타타르 스테이크, 햄버거), 샤브샤브, 훠궈, 굴라쉬 스프, 소주(아라크)(음식문화 1,2,3) 등이다.
고기를 미리 잘게 잘라서 꼬치에 하나씩 끼운 다음에 모닥불에 던져 놓고 다 구워진 다음에 꼬치를 잡고 먹는다면 말 그대로 접시도 필요 없고 포크나 나이프도 필요 없고 더군다나 설겆이니 뭐니도 필요 없는 한마디로 야전 식량으로서는 최고의 대용품이다.
바베큐는 여러 명이 식사를 한꺼번에 하는 의미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전투가 끝나고 승전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치루어진 일종의 만찬 메뉴다. 크게 불을 지피고 적군에게 약탈한 가축을 통째로 도살해 내장을 드러내고 장수는 그 심장을 섭취한다. 그리고 그 가축을 털도 안 뽑고 통째로 불에 천천히 구우면서 겉에 익혀진 부분은 야전용 나이프로 서로 돌아가면서 뜯어 먹고 속에 안 익은 부분은 계속 익혀가면서 결국 가축 한마리가 뼈만 남을 때까지 밤새 고기를 구우면서 잔치를 벌이는 것이다(도현신, 2012).
순대와 소시지는 몽골제국 군사들의 야전 도시락이다. 야채를 구하기 힘든 초원지대 출신인 몽골 제국은 내륙 지방에서 약탈한 야채와 짐승을 그 즉석에서 도축하여 소금을 듬뿍 절여서 보전하였으며 그것을 담을 용기로 바로 짐승의 창자를 사용하였다. 창자는 겉껍질을 벗기면 얇은 속껍질이 있는데 이 껍질이 바로 삼투막 기능이 있어서 고기와 야채를 곤죽이 되게 섞은 (때로는 곡식창고를 약탈할 경우 쌀이나 밀기울도 첨가하였다) 도시락 내용물을 아주 이상적으로 보전하여 주었으며 또한 소금에 절여 놓은 상태에서 한번 끓이거나 찔 경우는 상당히 오랜 시간 동안 반건조 상태로 지속되기도 하였다. 순대야 말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류가 오랫동안 즐기던 음식이라 아마도 음식으로 세계화를 하자면 이토록 공감갈 음식이 별로 없을 것이다.
육포는 소고기를 잘라 양념없이 건조한다. 겨울 내내 국이나 칼국수 등의 국물을 내는 데 요긴하다. 1년간 저장이 된다. 소 1마리 분의 고기가 소의 방광에 담아지므로 휴대식으로 이상적이다(김천호 : 189). 저장성과 운반성이 뛰어나 군사용으로 즐겨 먹었다.
양의 직장으로 만드는 게데스는 양의 피를 넣고 소금 간을 해서 솥에서 삶아 낸다(김천호, 2003 : 194). 야생 파나 마늘, 메밀 등 곡식가루를 넣기도 한다. 1960-80년대 까지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만드는 방법이나 과정이 똑 같다. 다만 제주에서는 돼지의 직장을 사용하는 것만이 다르다(김천호, 2002 : 141). 탐라의 ‘수애’문화, 양이나 염소의 장에 피와 약간의 메밀가루 그리고 소금간만으로 섞어서 삶아 낸다. 지역과 종교에 따라 가축과 사용하는 향신료나 곡류, 채소류가 다를 뿐이다. 반농반목지역(탐라, 고려 등) 몽골족은 돼지나 말에 찹쌀이나 밀가루, 잡곡류, 그리고 파, 마늘, 부추, 숙주나물 등을 넣기도 한다. 제주의 ‘수애’도 똑같다. 피와 곡식가루도 함께 넣는다(김천호, 2003 : 194). 비사 124절, 양의 피를 넣고, 소금 간을 해서 솥에서 삶아 낸다. 한 마리의 순대의 양이면 6-7인이 3일을 먹을 수 있다. 매우 부드럽고 구수하고 영양도 풍부하다(김천호 : 194). 내몽골인들은 돼지피로 만든 순대를 지금도 먹는다. 돼지피로 만든 순대를 먹는다(김천호, 2002 : 15). 우즈베키스탄의 고려인들도 똑 같은 방식으로 순대를 만들어 먹는다. 몽골의 지배를 100여년 이상 받은 제주의 ‘수애’ 사례도 동일하다. 1231년 삼별초 토벌과 몽골군사, 관료의 탐라 정착과 음식문화의 전래, 몽골군의 전투식량에서 기원했다(제주의 소리, 2009.11.17).
2. 몽골 전통식과 전쟁음식의 탐라 이입
몽골은 1273년 삼별초 토벌 후 탐라국초토사(고창석, 1984 : 382 ; 배숙회 : 97), 군민도달로화적총관부, 군민안무사, 고려환부 탐라총관부, 군민만호부를 설치하여 실리백 등을 임용한다(배숙희 : 97). 그관료(다루가치)와 진수군(진수군)이란 명목하에 몽골군의 일부를 탐라에 주둔시키는 과정에 이들과 목마장의 목호들이 래도(來島)한다. 이들 본관이 ‘대원(大元)’이다. 또 죄수와 운남 왕족도 유배시켰다(김동전 : 304-305). 탐라 진수군은 약 2,000여명 이내였다(고창석 : 391).
유라시아대륙을 정복한 몽골의 전통음식과 세계 각지역의 음식문화가 반영된 순대(게데스)와 육포, 소주, 탕국문화 등등이 탐라에 전래된다. 결국 몽골의 군사 패권이 음식문화를 세계화 시켰다. 힘, 武力, 기동력의 결과다. 130여 년 동안 몽골장수와 군인, 고려 왕실과 장군, 군인과 백성들의 주식 패턴과 군량의 조달과정을 통하여 몽골음식의 특성과 고려에 미친 몽골지배의 사회, 문화적 영향을 중심으로 주요 내용을 분석하면, 정복군대와 관료 주둔에 따른 음식문화 전파와 혼인과 부마 관계에 따른 문화적 영향으로서의 국물음식 탕, 육식과 포 문화, 순대와 떡 문화, 소주 문화, 상애떡, 빙떡 등의 관련성에서 유목문화의 일단을 찾고, 상호 영향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제주 탕국인 몸국은 유목민의 육식인 육류(돼지고기)와 해조류(모자반)의 문화가 결합된 음식이며(양용진, 2009 겨울), 고사리 육개장으로 발전되며, 빙떡은 몽골 야생메밀인 바이칼 메밀이 유입되어 오늘날까지도 주요한 향토음식이 되었다(양용진, 2008 여름).
제4장 대원제국 지배가 탐라사회에 미친 영향
제1절 경제, 사회문화적 영향
1. 경제적 영향
달로화적 탑자적은 부임과 함께 160필의 말을 방복시켰다. 목마장정책의 시초다. 동,서아막을 수산평과 고산에 설치한다. 그런 목마장은 치외법권지역이었다(고창석 : 392). 또 동시에 우량품종의 소를 이끌고 제주도에 와서 목장을 개설하여 여기서 전통을 자랑하는 제주도의 목마장 역사가 시작된다(이성우 : 31). 몽골인들은 제주 뿐만 아니라 둔전병의 주둔지와 일반 백성들에게도 농우 증식을 적극 권장했다. 이렇게 늘어난 소의 도살법과 요리법을 전한 것은 물론이다. 고려인들의 채식중심문화가 육식과 채식혼합문화로 변질하게 된 원인이다. 제주사회의 규모확대는 몽골의 탐라국립목장 설치와 밀접하게 관련된다(김일우, 2005 : 265).
몽골지배는 제주에 ‘우마사육법’을 전해 산업을 발전시켰고(윤덕인, 2001), 경제력의 바탕을 이뤘다. 외부문화 유입은 제주문화 정체성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김일우, 2006). 고려는 섬 지역에 말(馬)을 사육하고 농경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춘다. 제주도는 최대의 말 공급처였다. 탐라를 말의 사육과 산출지로 활용한다. 낙타, 소, 양, 나귀, 고라니도 사육했다(김일우 : 211).
2. 문화적 영향
문화적 측면에서는 100여년 간의 탐라와 몽골접촉은 다양한 문화적 변이를 불어왔다. 먼저 몽골인과 탐라여인의 혼인으로 인한 중국 성씨의 증대, 호복 유래, 혼례의 변화, 고기음식 성행, 몸국 등 국물문화 활성화, 몽골어 전래 등을 들 수 있다. 예컨대 성씨의 변화, 호본, 족두리, 혼례전 신랑이 신부집 가는 풍습 등이다.
(1) 사회문화
고려 25대 충렬왕부터 공민왕까지 일곱 임금이 몽고 여성을 왕비로 맞이하게 되면서 몽골문화가 쏟아져 들어와 이른바 몽골풍(蒙古風)이 다양하게 형성된다(김광언 외, 1993 : 245).
충렬왕은 卽位初에 正妃 元 公主(元 世祖의 長女인 齋國大長 公主)의 入國을 맞이하기 위해 西北 面에 행차하였을 때, 아직 辮髮하지 않은 隨駕臣僚를 크게 꾸짖고 마침내 충렬왕4년 2월에 모든 백성이 몽고의복과 몽고식 開剃辮髮할 것을 명하였다. 자연 출세를 希求하는 지식층에서 솔선하게 되고, 몽고어가 보급되고 심지어 蒙古流의 創氏改名이 일부 親元派 사람들에게서 유행하였다. 물론 二重姓名으로 하나는 高麗式, 하나는 蒙古式이었다. 왕실에서도 忠宣王을 비롯하여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으레 本國式 諱(휘) 외에 몽고식 諱를 兼有하였다. 또한 왕실의 正妃는 반드시 元室의 공주여야 했고 忠善, 忠肅, 忠穆의 세 王이 모두 元 公主의 소생이었다.
버드나무 민속, 석인상과 돌하르방, 아르히와 아랑지, 마문화, 연료와 쇠똥, 피뿌리풀, 겔과 거리, 언어 차용 등 문화의 접변이 일어났다(장장식, 2010). 한국의 성황당(탐라의 할망당)과 몽골의 오부(ovoo)의 유사점도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것들은 모두 개인과 동네의 안녕을 빌었던 샤머니즘의 일종이며, 지역경계 표시였다. 몽골의 훈촐로(석상)는 13-14세기에 건립되었다. 몽골의 돌장승 훈촐로와 제주도 돌하르방은 상당한 유사점이 많아 그 관련성을 깊이 연구해야 할 것이다. 몽골의 유학생인 바타르씨가 제주 돌하르방을 보더니 “이 석상은 몽골인들이 게르안에 앉았을 때의 모습과 같다”고 평했다(허용범 : 518).
결혼식 할 때 찍는 연지는 몽골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아직까지 살아 있다. 족두리도 몽골인들이 쓰는 물건이었다. 또한 남성들의 의복인 백포는 소매가 헐렁하고 길이가 짧은 옷인데 몽골의 영향으로 소매가 약간 작아지고 길이가 길어졌다. 이 옷은 조선시대에 와서 두루마기가 되었다.
탐라의 경우 비바리, 허벅(물긷는 옹기), 굼부리, 검부낭치 등 등이다. 제주에는 현재도 정낭(촐롱, chualung)이 남아 있다. 우마의 접근을 방지하는 통나무 기구. 애기구덕도 몽골족의 창작품이다. 제주의 그것은 대나무바구니(요람)로 만들어 흔들어 잠재웠던 아기 잠자리다.
(2) 언어, 인종적 영향
혼저 옵써의 ‘혼저’도 ‘빨리’라는 몽골어에서 유래했다. 애막(Ayimag, 道, 부락 등의 명칭), 아기(갓난애), 마누라 등도 몽골어이다(김기선 2008). 제주 ‘조랑말’은 몽골어 ‘조르모르’에서 유래되었으며, 말을 부리는 이들을 ‘테우리’라 하는 데, 소테우리, 말테우리 등으로 현재도 남아 있다. 1960∼80년대 시골 목동을 ‘테우리’라 하였다(배숙희, 2012). 제주에는 안채를 ‘안거리’로, 바깥채를 ‘밖거리’로, 그 사이에 있는 곁채를 ‘모커리’라 한다. 이 때에 쓰이는 ‘거리’가 몽골 전통 천막을 가리키는 ‘게르’에서 빌려와 굳어진 말이다(장장식, 2012 : 485). 물긷는 허벅은 몽골의 가죽물병 ‘허버’에서 유래했다(국립민속박물관, 2008 : 95)는 설이 있다.
제2절 음식문화적 영향
대만의 몽골인 교수 하칸츄르는 "제주도만큼 몽골 상층족, 귀족과 황족의 풍습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은 없다. 제주는 몽골의 옛 문화를 연구하는 寶庫다.”라고 했다(허용범, 1998). 13세기 이후 왕과 몽고왕비 유목민 등에 의해 몽골의 최상류층 문화와 유목민 음식이 유입된다. 13세기 탐라에 전해진 몽골풍 음식은 소주, 메밀, 탕, 육식, 순대, 상애떡, 쉰다리(쉰타라크) 등을 들 수 있다.
1. 육식문화적 영향
문화 간 접촉과 변용, 토착화 사례를 살펴 본다. 첫째, 문화의 변이이다. 음식문화적 측면에서는 100여년 간의 탐라의 몽골접촉은 다양한 문화적 변이를 불러왔다. 유목민의 특성인 ‘탕 문화’ 등의 유사성을 확인한다. 제주(탐라)와 몽골음식문화의 연관성은 우리가 즐기는 소주가 고려시대 몽골에서 전래되어, ‘소주도’ 최영이 즐겼던 술이고, 제주인들이 즐기는 ‘돗순대(돼지순대)’와 ‘빙떡’의 원조는 몽골이다. 대표적인 조리법도 삶기, 찜, 포, 훈제 등과 연료 절약을 위하여 한 번에 다량으로 삶는 방식도 상호 유사하다. 예컨대 음식의 ‘탕(湯)’문화, 순대문화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고려 말기에는 육식을 주식으로 하는 몽골의 침략과 그 영향에 의해서 육식이 왕성해졌다(임장혁, 2000 : 275-276). 육류의 조리법은 탕, 찌개, 구이 등 3가지지만 보편적인 것은 탕이다. 특히 보신탕은 전국적이다. 육개장도 같다. 원의 영향을 받은 음식들은 선지국, 설렁탕, 갈비탕, 편육 등이다(임장혁 : 283).
2. 변동과 유지측면
첫째, 탕문화다. 제주는 몸국, 돼지고기 국수가 진미다. 몽골은 지배기간 동안 우리나라에 많은 육류음식을 퍼뜨렸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설렁탕이다. 만두도 몽골인들이 가져 왔다. 또 다른 변화는 소주다. 몸국 등 고기음식 성행, ‘국물문화’가 활성화 등이다. 몽골인들은 고기우동(숄테이홀)을 양고기 국물에 말아 먹는다(서혜경 외, 2000 : 258).
둘째, 소주, 오메기술의 동질성이다. 소주라는 말은 태워서 만든 술이라는 뜻이다. 소주의 원명은 알코올을 가리키는 아랍어인 '아라그'(Arag)를 한역(漢譯)한 '아자길'(阿刺吉)·'아리걸'(阿里乞)이라고도 한다.
흔히 우리는 우리나라 소주의 기원을 고려시대로 알고 있는데, 다시 그 기원을 올라가면 중동 지역에 가 닿는다. 세 번 고아 내린 증류주(酎)라고 하여 이렇게 이름 붙여진 소주는 기원전 3000년경에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졌다. 그런 ‘아라끄’를 몽골군이 이슬람제국을 공격할 때 중동 사람들로부터 양조법을 배웠고, 고려시대 몽골군인들이 일본 원정을 위해 한반도에 진출했을 때 개성, 안동, 제주도 등 주둔지에서 처음으로 빚기 시작했다. 소주는 페르시아, 몽고, 만주를 거쳐 고려후기에 유입된다.
원 세조는 일본원정 계획에 따라 고려에 병력의 일부, 배, 군량 등의 담당을 강요하고, 당시 前哨基地였던 제주와 兵站基地였던 경북 안동과 개성은 오늘날에도 소주가 유명하다(이성우 : 216). 고려사에는 ‘최영열전’에 김진이 부하들과 소주를 밤낮으로 먹으며, 부하들을 매질하다가 왜구가 합포영(합포영, 마산)을 불사르자 단기로 도망갔다고 했다(김삼수, 1980 : 45).
셋째, 상애떡과 빙떡문화이다. 상애떡은 몽골인들이 목마장 작업중 휴식시간에 먹던 음식이다. 탐라는 부조음식문화가 발달했다. 걸명도 특이하다(오한샘 외, 2012 : 119). 몽골에서는 말고기를 식용하고, 마유(馬乳)를 즐긴다. 마유로 차, 치즈, 과자, 부식들을 만들어 먹는다. 제주인들도 말고기를 식용하는데 몽골식(食)의 제주 전이다. 제주인들이 즐기는 빙떡도 몽골에서 전래된 메밀을 재료로 하여 만든 음식이다. 제주인들은 2013년 현재도 막걸리로 상애떡을 만들어 먹고 있다. 또한 겨울철 빙떡은 별미 중의 별미다.
넷째, 순대(수애=게데스)문화이다. 1231년 삼별초 토벌과 몽골군사, 관료의 탐라 정착에 따라 음식문화의 전래, 몽골군의 전투식랑에서 기원했다(제주의 소리, 2009.11.17). 제주에서는 순대를 ‘수애’라고 한다. 탐라의 수애는 원제국의 해양대국을 꿈꾸는 병사들의 전마위에서 말달리며 먹던 군사용 비상식량이었다.
다섯째, 세뱃돈과 제사 음식문화이다. 몽골인들은 유제품을 즐겨 나눈다. 제주인들은 2013년 지금까지도 제사가 끝나면 그 제물들을 공평하게 참여자들에게 분배한다. 1980년대까지도 시골에서는 제사 후 남은 음식을 골고루 이웃집들에 돌렸다. 아이들이 대바구니에 담아 날랐다. 세뱃돈은 우리의 경우 윗사람이 아이들에게 주지만 몽골의 경우 는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드린다.
여섯째, 몸국과 돼지우동문화이다. 몽골인들은 국수도 즐긴다. 양고기를 넣고, 소금을 간하여 먹는다. 몽골에서는 면(麵)을 고릴이라고 하고, 밀가루로 만든 요리를 고릴타이홀이라고 한다. 칼국수보다 가는 건면을 고에몽이라고 한다. 고기우동으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으로 면을 먹는 형태이고, 이것을 숄테이홀이라고 한다. 제주의 고기국수와 일맥상통한다. 숄테이홀은 양고기 국물에 면, 고기 조각, 만길이라는 야생파, 후무루라는 부추를 넣고 끓인 것이다. 조미료는 소금이며, 저녁에 먹는다(서혜경 외 : 258). 한편 고릴테 슬은 감자, 양파, 파, 양고기에 칼국수를 넣은 것으로 거의 매일 먹는 대표적인 음식이다. 몽골인들은 국수를 즐긴다(김광언 외 : 244-245). 양고기 국물에 소금으로만 간한다. 2013년 현재 제주도 올래 돼지국수도 동일한 방식으로 조리한다. 돼지를 삶은 국물에 국수를 만다. 다른 점은 몽골은 유목민이라 양을, 제주는 농경민이라 돼지를 쓴다는 점 뿐이다.
일곱째, 고시레 풍습이다. 고수레(高壽寬), 또는 고시레란 산과 들에서 음식을 먹을 때나 이바지가 왔을 때 음식물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외치는 소리, 또는 그렇게 하는 행위이다. 흔히 '고시래'라 하고, 강화도 지역에서는 '퇴기시레'라 한다. 이는 신에게 바치는 공희(供犧) 의식인데, 잡신에게 제물을 떼어주고 달래어 쫓는 한편, 먼저 제물을 바쳐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이다. 고수레는 주언(呪言)과 공희 행위가 함께 이루어지는 주술이다. 몽골인들은 술을 마실때도 새끼손가락에 술을 묻혀 하늘을 향해 세 번 튕긴다.
여덟째, 마구(馬具)와 허벅, 아기구덕문화이다. 여자들이 물긷는 허벅은 몽골의 가죽 물병 ‘허버’에서 유래했다(국립민속박물관, 2008 : 95)는 설이 있다. 아기 구덕은 대나무로 만든 아기 요람이다. 흔들어 잠재우는 기구다. 이상의 주요 내용을 연구분석의 틀에 따라 몽골문화가 탐라에 끼친 영향을 < 표 6 >에 제시한다.
< 표 6 > 탐라의 몽골문화 영향 분석
구분 |
경제,사회적 영향 |
음식문화적 영향 |
탐라 |
교초, 우마사육 등 전함건조, 목마(전마) 사육 대원(大元) 본관 유입 몽골인과 제주인 혼인 정착 언어, 고시레, 게르(거리), 허버(허벅), 세뱃돈 풍습 등 유입 정낭, 아기구덕 馬具, 牛馬糞 연료 |
메밀유입과 빙떡, 상애떡 증류주 고소리술 정착 양고기국이 몸국(탕)으로, 제주 올래 돼지국수 탐라의 순대(수애) 쉰다리(타르크) |
제5장 나가는 글
본 연구는 13세기 몽골 대제국의 일본원정 전초기지로 삼았던 탐라지역의 문화적 영향을 탐라의 몽골 유습 사례 등을 토대로 탐라에 미친 주요 시사점을 사회문화적 영향을 중심으로 등을 분석하였다. 분석 결과는 첫째, 탐라는 일본원정과 해양세력 확대를 위한 전진기지 역할을 하게 된 지역이었으며, 둘째, 몽골의 탐라 로지역 통치는 내지의 변원지역과 비슷한 행정시스템을 도입하면서도 탐라의 지역적인 특성을 고려한 지배체제였다. 셋째, 13세기 몽골 대제국은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을 중심으로 한 구조였으며, 결과적으로 다양한 몽골인들의 탐라에 이주하여 그들의 문화이입이 성행했었다. 군이 이동하면 문화(제도와 음식 등)가 이동한다. 따라서 전쟁과 군사이동, 제국주의 지배가 피지배 지역에 미친 행정문화적 영향을 13세기 탐라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했다는 점에 연구의 의의가 있다. 넷째, 경제사회적 시사점 측면이다. 130여년의 몽골음식, 문화와 동화는 음식과 농경, 말 사육 기술, 성씨 고배, 혼인, 풍습 등에서 나타난다. 또한 음식문화적 측면에서는 2013년 현재 문화적 영향으로서의 국물음식 탕, 육식과 포 문화, 순대와 떡 문화, 소주 문화, 상애떡, 빙떡 등의 관련성에서 유목문화의 일단을 찾고, 상호 영향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제주인들은 대륙적 기질의 섬적 기질과 융합 기질 형성, 토속적 음식문화에 유목민음식, 육식중심 음식문화의 이입이라는 영향을 받았다.
당시의 몽골제국내의 문화 특성과 700여년 전 지배자들의 문화현상을 분석하여 현재 제주에서 전승되고 있는 문화현상을 해석할 수 있는 접근방법이다. 따라서 후속연구과제로서는 음식문화의 변동이론에 따른 변동 분석과 동시에 음식문화의 유사점, 상이점 분석을 통한 문화교류의 양방향 영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13세기 타 지역 11개 행성의 로행정구조 분석을 토대로 하여 탐라 노행정의 특성과 구조를 밝힐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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