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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탕(湯)과 갈비문화 연원 분석

현곡 이종수 2018. 8. 20. 14:14


2018112, 한국문화정책학회 발제문임. 무단인용을 금함.


우리 탕()과 갈비문화 연원 분석

Source Analysis of Tang() & Galbi Culture of Korea

- 近代의 한양과 수원을 중심으로 -


   이종수(중앙대 연구교수)

이종수(중앙대 연구교수)

- 目 次 -

. 들어가는 글

. 음식문화 변동의 의의

. 탕과 갈비문화 실태분석

. 탕과 갈비문화 계승과 시사점

. 나가는 글

참고문헌

 

 

< 요 약 문 >

 

본 연구는 고려시대 후기의 육식문화와 탕음식 문화 유래와 특성을 한양과 수원의 음식문화를 중심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주요내용은 13세기 제국의 문화가 고려개성, 조선 한양과 수원의 음식문화에 미친 영향을 고찰하고, 한양과 수원의 음식문화가 주체적으로 변용시키며 유지시켜 온 변동 내용과 특성 측면 분석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연구문제는 어떻게 해서 몽골제국 음식인 슐렝(šűlen)이 설렁탕으로, 고려의 설야멱이 조선의 너비아니와 수원의 왕갈비로 전승되었는지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본 고는 고려 후기 대원제국 지배하의 문화적 영향과 관련된 필자의 주요 선행연구에 이은 후속연구로서 한양의 탕 문화와 수원의 왕갈비문화 연원을 밝혀 보고자 하였다. 음식문화의 변동은 전쟁이나 이민 등의 교류 및 상인이동이 문화교류 추진과 변동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13세기 몽골제국의 영향에 따른 문화변동과 탕과 갈비문화 토착화 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시대에 오늘날 우리나라 음식문화 정체성이 정립되고, 몽골제국 영향으로 쇠고기 문화가 이입되어 확산되고, 조선시대는 개성과 한양의 설야멱, 너비아니와 한양(서울)의 설렁탕 문화와 수원유수부의 왕갈비문화가 꽃을 피운다.

 

국문주제어 : 음식문화, 육식문화, 문화, 맥적(貊炙), 한양의 설렁탕, 수원의 왕갈비

 

. 들어가는 글

 

이 글에서는 근대(18001900년대) 한양과 수원을 중심으로 음식문화의 특성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원제국과 고려, 조선의 육식문화, 설렁탕() 관계를 음식교류적 측면에서 음식문화 사례를 분석한다(서긍, 2005 ; 가사협, 2006 ; 홀사혜(忽思慧), 1314 ;居家必用1200년대 ; 거가필용 사류전집, 1987 ; 김유, 水雲雜方; 서유구, 1983).

고려시대에 오늘날 우리나라 음식문화 정체성이 정립되고, 조선시대에 탕과 갈비문화 등이 발전적으로 계승된다. 탕과 갈비문화의 고려시대는 몽골 영향으로 쇠고기 문화가 이입되어 확산되고, 조선시대는 개성과 한양의 설야멱, 너비아니와 서울의 설렁탕 문화와 수원유수부의 갈비문화가 꽃을 피운다.

본 연구는 우리나라 식문화 특성의 두 주역이라 할 수 있는 탕과 갈비문화의 연원과 확산분석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선행연구(필자 포함)들과 차별성이 있다. 분석의 범위는 고려의 육식문화와 설렁탕() 관계 측면을 토대로 음식문화 사례를 한양과 수원지역의 음식문화에 한정하여 비교한다. 주요 연구문제는 어떻게 해서 고려시대 육식문화가 유입되고, 슐렝(šűlen)이 개성과 한양(서울) 설렁탕으로, 고려의 설야멱이 수원의 갈비문화로 토착화 되었는지 등을 분석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방법은 13세기 전후 개성에 대한 원제국지배의 선행연구 분석 및 문헌연구와 필자의 음식문화 선행연구(이종수, 2016 ; 2015 ; 2014.12 ; 2014.8 ; 2013.6 ; 2012.6) 결합을 통한 한양, 수원지역의 음식문화 특성으로 본 연구는 필자의 선행연구에 기초하여 탕과 갈비문화의 연계성을 확인하고 현대적 의의를 찾고자 하는 데 연구의 의의가 있다.

 

. 음식문화 변동의 의의

 

1절 음식문화의 의의와 특성

 

1. 음식문화의 의의

 

고려시대는 불교를 더욱 발전키며, 살생을 금지하였기 때문에 채식을 주로 하는 식생활이 발달되었다.

먼저 원제국 지배 이전의 고려음식은 高麗圖經을 통해 일부 확인할 수 있다(서긍, 2005). 관리들의 봉록도 생쌀과 채소를 줬다. 처음으로 국()고려도경에 나온다(송재경, 2013, 15-16). 高麗圖經은 멥쌀, 보리, , 수수 등을 먹고, 면은 잔치음식이었다. 徐兢高麗圖經에서 죽부(鬻釜, 쇠솥)는 음식물을 삶는 기구인데 철로 만들었다.

양과 돼지로 국과 구이를 하였으며, 안주는 양육, 제육, 해물이 쓰였다. 윤덕인도 高麗圖經분석에서 국()이 처음 나오고 있음을 밝혔다(윤계순, http://www.jbfood.go.kr).

 

2. 탕 문화의 기원과 토착화

 

(1) 탕의 의의

 

()이란 국을 높여 이르는 말이다. 고기, 생선, 채소 등에 물을 붓고 간을 맞추어 끓인다. 또는 제사상에 올리는 건더기가 많고 국물이 적은 탕은 국이다(국어사전). 약어로 탕() 또는 탕국이라고도 한다. 어탕(魚湯), 육탕(肉湯) 등이 그 예이다. ‘이 순수 우리말이며 은 한자어다.

(), (), (, 고깃국)의 구분점은 국물이 많은 국을 이라 하고, 건더기가 많은 국을 이라 하였다(증보산림경제). 음식 디미방에서는 갱을 끓인다는 내용이 전한다. ()은 채소와 고기(어류, 육류)를 대형 가마솥에 넣어 끓여 개인용기에 나누어 먹는다. 은 고기를 중심으로 끓인 국이다. 은 소형용기나 냄비 등에 직화로 끓인 국이다. 고대에는 갱, , 학이 구분되었으나 중세 이후 구분이 모호해졌다.

삼국시대 삼국사기국문화는 려말 유목민 음식문화 유입과 채소국과 육류탕 문화의 결합으로 인한 육개장, 곰탕, 설렁탕, 고사리 육개장 등으로 발전하고 이후 조선시대 토착화 이래 현대까지 삼계탕 등으로 탕 문화가 전개 중이다. 고구려와 백제, 한족의 음식문화는 고려의 유목민 음식문화 유입과 조선시대 유교적 의례문화의 결합으로 탄생한 음식문화로 정리된다.

삼국사기고구려 본기 동천왕조 기록에도 국()에 대한 기사가 있다. 고려 후기에는 원제국 조리법인 만두나 설렁탕 등이 유입된다. 우리의 고전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는 무려 58종의 탕이 실려 있다(서유구 1983). 고려사, 고려도경에는 아욱국이 나오며, 이규보의 나물국, 토란국, 채소국 등도 보인다(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14, 77).

(2) 탕문화의 기원과 사례

 

육식문화의 발전은 고려시대 원제국의 영향으로 쇠고기 문화가 이입되어 확산되었다. 4가지 설이 전하며, 필자가 공탕설을 주장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다(이종수 2013, 2014, 2015). 몽골의 공탕(šǜlen)문화는 양이 으뜸이다(Buell, 2003).

첫째, 몽골 기원설은 몽골어 사전 몽어유해(蒙語類解)에 등장하는 원나라 유목민의 고깃국 '슐루'가 고려에 전래됐다는 것이다(이성우 1982). 육당 최남선에 의하면, 몽골에서 맹물에 소를 삶아 먹은 음식을 술루라고 불렀고 이것이 고려로 넘어오면서 설렁탕의 어원이 된 것이라고 한다. '술루'(설루 또는 슐렁)란 몽골제국의 정복활동 당시 몽골 기마대가 식사를 할때 먹은 음식이 원형으로 커다란 솥에 물과 곡물가루, 소나 말 등의 뼈와 고기를 넣고 끓인 일종의 고기죽이다. 기마대 중심으로 빠른 기동력을 살렸던 몽골제국은 일반적인 보급선을 유지하기가 어려웠고 장기간의 원정에 짐이 되는 식량을 동반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에 소나 말 등을 끌고 다니며 방목하다가 끼니때가 되면 소나 말을 잡아서 말에 싣고 다니던 곡물가루와 같이 끓여 먹는 것으로 식량문제를 해결했다(오영주 2016). 원의 영향으로 곰탕과 같은 고기 국이 발달한다. 조선의 山林經濟는 원제국의 居家必用을 대부분 참조했다.

이기문(1978/1991)슈라’[御膳]가 중세 몽골어의 sülen[]의 차용어임을 주장하나 천소영(1986:103)에서 설렁탕의 설렁의 어원을 알타이어적인 요소로 보고 있다.

공탕선호는 몽골비사에도 자주 나오고 있으며, 찜 요리는 몽골의 대표 음식으로 꼽힌다. 居家必用의 철속탕(撤速湯)은 우리의 설렁탕 조리법과 유사하다.

둘째, 설렁탕이 언급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809년 쓰인 빙허각 이씨규합총서(閨閤叢書)'충주 검부 앞 셜넝탕'이다. 서울 음식으로 알려진 설렁탕이 충북 충주 검부(禁府) 앞 명물로 기록된 건 19세기 전국에 시장이 활성화되면서 시장 음식으로 딱 맞는 설렁탕도 전국적으로 퍼졌기 때문이다. 이성우는 원제국의 영향으로 선지국(청진옥, 시골집), 설렁탕(이문설렁탕), 갈비탕, 편육(낙원상가) 등의 전국화를 들었다. 13세기 유목민의 양()음식()이 농경민족(, )의 쇠고기 음식인 탕국으로, 영양 보양식, 소금간과 증류식 소주, 숟가락과 젓가락 문화, 깍두기와 김치 등의 조합을 가능케 했다.

셋째, 개성 사람 설령(薛鈴)이 고려 멸망 후 한양으로 이주해 탕반 장사를 하면서 그의 이름에서 설렁이 유래했다는 설이다(경향신문 1954. 8. 29).

넷째, 일본의 이두 전문가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주장한 '설넝은 이두로 잡()이라는 뜻'이라는 설 등이 있다. 캐나다 선교사 게일이 1897년 펴낸 한영자뎐에는 설렁탕을 소의 모든 부위가 아닌 'a stew of beef intestines(소 내장으로 끓인 국)'으로 설명돼 있기도 하다(조선일보2014.11.5).

 

(3) 고려시대 탕국의 토착화

 

13세기 중반 이래 몽골의 침입으로 그들의 식육문화가 유입되고 고려 음식문화가 정립된다. 13세기 몽골제국의 大都(북경)는 북적대는 인파로 북새통이었다. 사람들은 뜨거운 양고기와 거위고기 등과 탕 종류, 뜨거운 음식으로 요기했다(김종래, 2009, 200). 원제국의 국물문화는 몽골비사, 음선 정요등에서 확인되며, 고려사에도 왕이 신하에게 국을 하사하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설렁탕의 토착화란 상이한 음식문화를 가진 개인들로 구성된 집단이 계속 직접 접촉하면서 양방이 집단이 가지고 있던 원래의 문화형에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으로 본다. 한양의 음식문화변동이란 한양 지역민과 내방자(지역민과 원 제국 황족, 군인 등)들을 중심으로 한 지역음식이 원제국의 군대 주둔지로 종속되면서 또한 이들의 식사해결에 대응, 적응하면서 개성(한양)지역에 정착된 음식문화로 정의한다. 그것들 중의 하나가 소주, 만두, 설렁탕, 편육, 순대 등이다.

 

3. 갈비문화

갈비의 역사적 기원, 원류 분석(禮記, 儀禮, 居家必用, 거가필용 사류전집, 飮膳正要, 山林經濟 1,2)측면에서의 기원은 갈비(曷非, Galbi)와 고구려의 맥적(貊炙)과의 동질성과 고구려 맥적이 불고기와 갈비로 발전한다. 3세기 진()나라 搜神記, 高麗史,해동죽지(海東竹枝)雪下覓 등의 기록아 남아있다.

설야멱은 전통적인 고기구이인 맥적(貊炙)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산림경제閨閤叢書에 등장한다. 불천위 제례 제수에서 현재도 전수되고 있다. 물에 담갔다가 굽는 방식인 설야멱은 예로부터 개성에 전해진 명물이라고 옹희잡지, 해동죽지에 기술됐다. 1609년 명나라 사신이 광해군을 책봉하러 왔을 때 대접한 음식이기도 하다. 다른 명칭이 관적(串炙)이다.

 

2절 선행연구와 분석의 틀

1. 선행연구 분석

첫째, 고려 이전의 한국식생활연구 등과 사료로는 高麗史,高麗史節要, 高麗圖經, 居家必用, 飮膳正要(홀사혜, 1987),齊民要術등과 이성우(1984)의 연구에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의 山林經濟居家必用의 조리법을 대다수 원용하고 있다.

둘째, 음식문화와 관련하여 Lévi-Strauss(1978)는 문화구조 분석을, Berry(1982)는 음식문화의 변동 분석을, Buell(2003)13세기 몽골제국의 음식문화 분석을, 홀사혜는 대원제국의 음선정요(飮膳正要)를 저술하여 음식과 건강과의 관계를 분석하였으며, 윤서석(2008)은 한국식생활 문화를 분석하여 문화와 문화변동 및 지역적 음식문화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최근 김봉석(2014)은 몽골의 설렁탕과 소주가 고려에 전래된 연원을 밝히고 있다. 이종수는 오늘날 우리나라 탕국문화가 형성되었으며, 숟가락과 탕국 발전 관계, 오늘날의 국밥과 해장국, 탕국문화와의 관계, 설렁탕과 곰국, 몸국은 어째서 한 뿌리인가 등의 연원과 유래를 분석하였다(이종수 2014.8 ; 2015.12). 13세기 대원제국의 육식문화와 탕국문화가 고려에 토착화된다(이병렬, 이종수, 2014.12 : 283).

齊民要術(가사협 2006), 거가필용사류선집(작자미상 1987), 飮膳正要(홀사혜 1987)에서 증류식 아자길주를 최초로 기록하고 있으며, 徐兢高麗圖經이나 조선의 山林經濟(홍만선 2007) 등에도 탕과 소주 등이 전해진다.

이상의 연구와 본 연구의 차별성은 원 제국 지배와 한양의 음식문화 변동과 적응내용을 13세기 이래 식용되어 온 토속음식 중 설렁탕과 갈비문화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는 점이다.

 

2. 분석의 틀

 

본 연구는 우리나라 식문화 특성의 두 주역이라 할 수 있는 탕과 갈비문화의 연원과 확산분석이라는 점에서 고려의 개경문화를 계승한 한양과 수원 유수부의 갈비문화 발전이라는 점에 초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선행연구들과 차별성과 독창성이 있다.

 

. 탕과 갈비문화 실태분석

 

1절 탕국 문화

 

1. 한양의 탕 음식문화 특성

 

먼저 한양은 조선시대 초기부터 500년 이상 도읍지였으므로 아직도 한양서울음식은 조선시대 음식풍이 남아 있다. 한양 음식의 간은 짜지도 맵지도 않은 적당한 맛을 지닌다. 대표적인 서울음식은 설렁탕, 잣죽, 떡국, 국수장국, 육개장, 신선로(열구자탕), 구절판, 탕평채, 도미찜, 경단 등이다.

둘째, 고려후기, 조선시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울음식은 탕국문화가 중심이다. 2011KBS 1TV '한국인의 밥상조사에 의하면 서울4대문 안 토박이들의 대표음식은 설렁탕이다(연합뉴스 2012.1.4).

셋째, 한양(서울) 음식 정체성과 특성으로 음식은 복식(衣服, 服飾)이나 주거문화와는 달리 민족정체성과 가장 연관성이 깊다. 서울의 기본음식도 탕국인 설렁탕, 곰탕, 국밥 등이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음식이 설렁탕이다.

 

2. 변동과 유지 측면

 

한양은 쇠고기 탕국 중시 설렁탕, 잔치국수 등의 양반문화 특성을 띤다. 숟가락과 젓가락 사용의 탕국문화가 중심에 자리한다. 변동측면에서 보면 육류와 채소, 생선, 해조류 등을 조화롭게 활용하였으며, 국과 무침, 조림, 구이, 튀김, 지짐 순이다. 특히 탕()국 중심으로 발전, 계승된다. 설렁탕, 곰탕 등 삶고, 끓이기 문화가 정착된다. 쇠고기 설야멱이 너비아니로 변동되며, 설렁탕은 깍두기, 대파, 소금이 전부였다. ()에서 증류식 소주 유입 등을 들 수 있으며, 유지측면의 주요 특성들은 유교예법을 중시하여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용으로 반상, 면상, 주안상 등이 발달했다. 국물중심의 음식문화로 젓가락과 숟가락 동시 사용 등이다.

설렁탕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일제강점기 무렵으로, 설렁탕의 실제 기원은 이문설렁탕이다. ‘이문설렁탕은 우리나라 최고(最古), 즉 가장 오래된 식당이다. 1904년 무렵 문을 열었다고 알려졌다. ‘이문(里門) 부근에 있는 설렁탕 집이니 이문집이라 불리다가 이문옥里門屋이 되었고, 지금의 이문설렁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조선 말기, 대한제국(1897-1910),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설렁탕은 저잣거리 서민들의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이문설렁탕이나 해장국집 청진옥에는 나무꾼들이 주요 손님이었다. 이른 아침 동소문을 거쳐서 땔감을 한양(경성)으로 져 날랐던 나무꾼들은 땔감을 부려놓고 설렁탕 한 그릇으로 주린 배를 채웠던 것이다. 서민의 길거리 음식이다 보니 기록도 변변치 않다. 1926평양인상일제강점기인 1926824일 동아일보의 평양인상이라는 기사에는 설렁탕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전략) (서울)설렁탕은 뿔만 빼놓고 소고기란 모조리 휩쓸어 넣고 끓이는 국입니다만, 이곳 명물은 모든 잡고기는 다 제쳐놓고 그중에 혹살, 혓바닥, 우량 우신 등을 비롯하여 그중에 맛있고 연한 것만 넣고 끓이는 것입니다. 그 까닭에 서울 설렁탕같이 기름지지는 못할망정, 깨끗하고 맛있습니다. 설렁탕같이 쇠털 내음새(냄새)는 조금도 나지 아니합니다. 이것도 값은 서울 설렁탕보다 쌉니다. 한 그릇에 십 전씩입니다. 맹물에는 밥도 넣거니와 밀국수도 섞어 넣어줍니다. (후략)”

이상에서 분석한 한양의 음식 계승과 유지적 측면은 쇠고기 탕국 중시 설렁탕, 잔치국수 양반문화의 전통 및 백성의 탕국 문화의 계승이다.

2절 갈비문화

 

1. 수원 갈비문화 분석

 

정조시대 화성축성에는 모군(募軍) 등 잡부들의 인건비가 70% 이상으로 지출된다. 9,779냥이다(김균태, 2009 : 4-5). 마소 운임에도 1,169냥이 집행된다. 모군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수원지역으로 들어와 천막을 짓고 눌러 앉았다. 공사가 끝나자 다른 일을 달라고도 했다(이달호, 2007 : 148). 화성과 둔전관련 경기도 수원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대왕이 효심과 개혁을 위해 세운 신도시이자 최초의 계획도시이다. 정조대왕은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인 헌륭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성(華城)을 축조, 수원의 자립 기반을 다지기 위해 둔전을 경영했다. 백성들에게 논밭을 나누어주고 농사를 잘 짓도록 종자와 소를 나누어 줬다. 1년 도지(사용료를 치르고 빌려서 경작하는 논밭)로 소 한 마리당 쌀 20말을 내게 하는 조건이면서 3년 안에 송아지 한 마리로 되갚는다는 약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점차 늘어난 소를 팔고 또 송아지를 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 수원 우시장은 전국 3대 우시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수원에서 갈비가 발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시장의 영향이 컸다. 소 공급이 풍부해 갈비를 구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또한 수원은 예부터 곡창지대가 근접해 있을 뿐 아니라 한양으로 들어가는 농수산물의 집결지여서 먹을거리 문화가 풍부했다. 화성은 군사적인 기능만큼이나 백성들의 삶도 중시한 도시다. 화성이 한양과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잇는 위치에 있는 것을 고려하여 전국의 상인들이 모여 거래할 수 있도록 길을 새로 만들었다. 또한 많은 양의 물건을 거래하는 대상으로부터 소상인들을 보호하였고 가난한 상인들에게는 무이자로 돈을 빌려 주기도 했다. 이렇게 상업을 활성화시키는 여러 정책이 실시되었고, 이런 정책 덕분에 화성의 경제가 발달할 수 있었다.

또한 화성은 정조의 성리학적 민본행정에 따른 백성중심사상이 실학으로 구현되고, 신도시개발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시행에 따라 시전과 상업구조의 변화를 유도하여 백성의 삶의 질을 제고하고, 수원의 음식문화를 정립하는 계기를 열었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이 완공된 17969월 의궤청(儀軌廳)이 설치되어 2년 동안의 각종 기록과 자료들을 정리해 완성된 것이다. 모두 108책으로 되어 있는 화성성역의궤에는 최고 수준에 도달한 정조 시대의 과학기술과 문화 역량이 총집결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화성 성곽은 1975년 정부가 복원한 것인데, 당시 불과 3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공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자세한 설명과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그림 덕분이었다. 이외에도 화성성역의궤에는 도시와 성곽(城郭) 및 행궁(行宮) 축조와 공사에 관련된 공식 문서와 참여 인원, 소요 비용 및 물품, 건축 설계 및 이용 도구, 예산 및 결산에 관한보고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에 이른 기술자의 명단까지 직종별로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에 천민(賤民)인 석공이나 목수, 미장이나 기와장이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또한 임금을 하루 반나절까지 세밀하게 계산하여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동시에 정조의 성리학적 민본행정에 따른 백성중심사상이 실학으로 구현되고, 신도시개발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시행에 따라 시전과 상업구조의 변화를 유도하여 백성의 삶의 질을 제고하고, 수원의 음식문화를 정립하는 계기를 열었다.

갈비문화의 토대로서의 우시장 형성과 관련하여 정조시대 화성건립을 계기로 소시장, 불고기 문화가 활성화 한다. 정조의 둔전, 국영농장 대유둔 정책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이 유입된다. 수원유수부에서 잔치에 소고기 식용 시책으로 소고기소비 활성화, 갈비문화로 정착된다(정해득, 2012 ; 최홍규, 1993).

영조가 신하들에게 쇠고기를 먹자고 제안하자 (=임금)께서는 금육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본인은 드신다는 말도 나왔다. 정조도 늦은 밤 규장각의 신하들과 난로회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이종수, 2015).

수원 갈비는 조선시대 너비아니에서 진화하였다. 정조시대 화성건립 시에 소시장이 활성화 된다. 정조의 둔전, 국영농장 대유둔 운영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된다. 수원유수부에서 잔치에 소고기 식용, 갈비문화로 정착된 것이다. 현대로 들어와 수원갈비와 갈비탕으로 발전(월간조선, 2004.6)한다. 현대의 수원 소금구이 화춘옥 왕갈비와 1970년대 박정희의 시식 에피소드로 유명세를 탔다.

경기도 수원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대왕이 효심과 개혁을 위해 세운 신도시이자 최초의 계획도시이다. 정조대왕은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인 헌륭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성(華城)을 축조, 수원의 자립 기반을 다지기 위해 둔전을 경영했다.

우시장이 서는 날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소장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1940년대, 수원문밖 장(지금의 영동시장)화춘옥에서 수원갈비가 탄생했다. 갈비를 넣은 해장국에서 시작해 커다란 갈비 뼈대에 붙은 갈빗살에 소금으로 양념해 숯불에 구워낸 수원갈비로 발전한 것이다. 화성 축성의 전체 투입인원은 약 12만 여명이었다. 인건비로 66%가 집행된다(이태열 외, 2001 : 72-73). 당시 화성건설 물자는 석재, 목재, 기와, 철물, 기계, 각종 재료와 잡물 등이다(이달호, 2007 : 107-128).

수원 왕갈비엔 한반도와 수원의 역사가 흐르고 있다(조선일보, 2013.11.5). 갈비문화의 핵심에는 고대로부터의 맥적 문화를 각인시켜 온 북방 유목계 배달겨레인 선비, 농민, 노동자들의 땀과 노고가 깃들어 있다(이종수, 2014.4 ; 2015.12). 조선시대의 너비아니는 현대 갈비로 진화한다. 현대적인 수원갈비는 소금을 위주로 하는 양념갈비와, 간장을 위주로 하여 양념하는 예산갈비로 변화한다. 오늘날 수원갈비의 기원을 찾으면 화춘옥이 나오고 그것은 궁중요리에 연결된다. 결국 궁중요리와 수원 유수부의 행사 등에서 사용되어진 쇠고기 요리가 수원화성 건설과 관련되어 동원되어진 연간 3천여 명 이상이 모군(募軍)과 막일꾼 등에게 국밥과 함께 제공되면서 확산되어진 것이다(윤종군, 2013).

역사적 측면에서 보아도 한국인들은 고기를 구워 먹는 걸 좋아한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은 기본이다. 기마민족의 후예라 그런지 한국인들에게 숯불구이를 선호하는 유전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에 피워 즉석 고기구이를 즐기는 우리의 습성은 먹고 살기 좋아진 현대에 생겨난 풍속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17세기 조선 숙종 때 학자 홍만선이 쓴 산림경제에는 우리나라 숯불구이의 특징을 보여주는 기록이 있다. 홍만선은 산림경제에서 숯불구이를 설하멱적(雪下覓炙)이라 표현했다. 소고기를 편편하게 잘라 칼 등으로 찧어 부드럽게 만든 후 꼬챙이에 꿰어 기름소금에 재었다가 기름이 충분히 배어들면 은근한 불에 굽는다고 했다. 고기를 구울 때 물에 담갔다가 빼면서 굽기를 세 번 반복하는데, 이렇게 구우면 고기 맛이 부드럽고 맛이 좋다고 적었다.

홍만선이 적어놓은 고기 굽는 법과 기름소금이라는 양념장이 중국의 고기구이와 확연히 달랐기 때문에 고구려의 맥적과 고려의 숯불구이가 중국에 이름을 떨쳤다. 순조 때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에는 예전에는 첨자(簽子) 즉 대나무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서 구웠는데, 지금은 철망을 쓰니까 꼬챙이가 필요 없어 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순조시기에 오늘날처럼 고기를 구울 때 석쇠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시기에 석쇠를 사용해 고기를 구웠는지, 언제 석쇠가 발명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옛 문헌에서 석쇠가 주로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은 조선 중종과 선조 무렵이다. 조선 중기 이후 꼬치구이 대신 석쇠에 고기를 굽는 현재의 광양 불고기와 같은 조리법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며 풍류를 읊었다. 눈 내리는 날에 김술부 공과 함께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난로회를 열었는데 방안이 연기로 후끈거리고 파, 마늘, 고기 굽는 냄새가 온 몸에 배었다. 공이 북쪽 창문으로 가서 부채를 부치면서 맑고 시원한 곳이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이 멀지 않다고 말했다(난로회 :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10월이 되면 소고기를 기름간장, 달걀, , 마늘, 후추가루 등으로 양념해 화로에 구워먹는 풍습이라 한다). 개화기인 1910년대에는 서울 갈비집으로 명월관, 태화관 등이 있었다(이재규, 2002 : 480).

정리 한다면, 맥적에서 비롯된 우리의 고기 굽는 방법이 신라, 고려 때는 설야멱이라는 숯불 꼬치구이를 거쳐 철판구이, 석쇠구이, 돌판 구이 등으로 발전했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조리기구가 만들어지며 국물과 함께 먹는 현대적인 전골과 불고기, 갈비문화로 발전한 것이다.

 

2. 수원 갈비의 주요특징

 

수원갈비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크기와 양념을 꼽을 수 있다. 수원갈비는 종종 수원왕갈비라 불리는데 수원갈비에 자가 붙는 것은 과거 정조 대왕부터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라의 지도자가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커다란 갈빗대 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초창기 수원 왕갈비는 그 크기만 15cm가 넘었다. 타 지역보다 23배 이상 큰 갈빗대 크기 때문에 수원갈비가 왕갈비라 불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이 12cm 내외로 작아졌지만 여전히 다른 갈비보다 크기 면에서나 양적으로 우월해 푸짐하다. 주로 일본식 양조간장으로 양념을 하는 다른 갈비와는 달리 수원갈비는 소금 간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설탕, 마늘, 깨소금, 참기름, 후춧가루 등을 더하는데 간장과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고기 맛이 담백하고 육질이 부드럽다. 또한 쇠고기의 신선한 색을 그대로 유지해 맛깔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양념 후 숙성시킬 필요 없이 즉석에서 구워낼 수 있어 조리가 간편하다.

수원갈비 특징은 소금 간은 高麗, 元帝國 문화와 상통하는 문화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다(이종수, 2016ab). 간장을 사용하지 않고 소금과 설탕, 후춧가루, 참깨, 참기름, 마늘 등으로 양념하여 느끼하지 않고 색의 변화가 없으며 담백한 맛을 유지한다. 크기는 1017cm 내외로 소금양념과 커다란 갈비 크기가 특징이다(이재규, 2002). ‘수원갈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이야기를 간직한 공간을 모토로 지난 2월 오픈한 수원갈비스토리에서는 수원갈비 원조의 맛을 그대로 재현하는데 주력한다. 양념부터 갈빗대 크기, 숯불에 초벌구이 해 내는 것까지 전통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 여기에 표준화된 조리법을 정립해 언제나 같은 맛을 낼 수 있도록 시스템화했다. 전통방식을 잇는 동시에 이를 현대화하여 수원갈비의 정통성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 탕과 갈비문화의 계승과 시사점

 

1. , 갈비문화의 근대적 계승

 

원제국의 음식문화는 동서양의 음식문화가 융합된 혼종음식문화로 그런 세계적 혼종성이 고려와 탐라에 전파되어 오늘의 고기국물문화로 변형적으로 정착되어 토착화됐다. 1314세기 대원제국의 음식문화는 8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남아 지역연대가설을 뒷받침하고, 지역문화로 정착되었음이 확인된다. 몽골제국 유목민들의 양고기 중심문화가 고려의 경우 농경문화에 따른 소와 돼지고기 중심의 육식과 국물문화로 토착화 된다.

우리나라에서 국물()문화의 발달이유는 주식인 밥을 부드럽게 넘어가게 하기 위함이며, 가난한 서민들의 배를 국으로 채워 포만감을 유지케 하고, 온돌의 발달로 남는 열을 이용하는 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삼국사기국문화, 려말 유목민 음식문화 유입과 채소국과 육류탕문화의 결합으로 인한 육개장, 곰탕, 설렁탕, 고사리 육개장 등으로 발전된다. 조선시대 토착화 이래 현대까지 삼계탕 등으로 탕문화가 전개 중이다. 이성우는 원제국의 영향으로 선지국(청진옥, 시골집), 설렁탕(이문설렁탕), 갈비탕, 편육(낙원상가) 등의 전국화를 들었다. 결과적으로 원제국 지배문화의 유입과 영향, 자연환경과 의례적 영향, 기타 등에 영향 받으며 탕 문화로 정착, 토착화되었음을 확인했다는 점이다.

부여, 고구려의 맥적에서 비롯된 갈비는 고려 때는 설야멱이라는 숯불 꼬치구이, 조선시대 너비아니로 변화하면서 발전했고, 근래 새로운 조리기구가 만들어지며 국물과 함께 먹는 현대적인 전골과 불고기, 갈비문화가 됐다.

2016년 현재 해외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문화 콘텐츠는 한식과 K-pop으로 1위는 한식(46.3%), K-pop(39.0%), K-fashionBeauty(35.8%) 순으로 한식은 전통성과 역사성, 건강성 측면에서 문화 콘텐츠가 대단히 풍부하다. 예컨대 한식은 데치고, 삶고, 끓이고, 볶고, 무치고, 지지고, 부치고, 조리고, 찌는 등 수많은 조리법이 있어 다양성이 높은 음식이다. 따라서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 될 수 있다는 점을 헤아려 전통음식 정체성 스토리텔링을 마케팅 할 필요가 있다. 그 내용들은 음식의 역사, 전통, 건강, 장수, 영양 등의 효과를 불어 넣는 일이다.

 

2. 주요 시사점

 

첫째, 본 연구는 한양과 수원의 음식문화의 사회문화적 측면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육류의 보편화와 탕중심 음식문화의 기원과 토착화 현상을 확인하였다.
둘째, 문화적 영향측면에서 보면 외래와 한반도의 전통적 음식문화의 결합에 따라 한국요리는 오랜기간 숙성된 뒤에 우러나오는 담백한 맛을 추구한다는 점이다.

셋째, 한양음식문화 정체성은 조선보다 고려에 그 원형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고려후기부터 몰골제국의 영향은 한양 천도 후의 궁중의례나 백성들의 식문화 유지됐음을 밝혔다.

끝으로, 육류의 보편화와 탕 중심, 갈비문화의 기원은 고려시대 몽골제국 문화에서 유래되어 고려와 한양에 토착화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이종수, 2014.8 : 67-68).

 

. 나가는 글

이 글은 우리나라 식문화 특성이라 할 수 있는 탕과 갈비문화의 연원과 확산분석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선행연구(필자 포함)들과 차별성이 있다.

주요 내용은 음식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너비아니가 수원 왕갈비로 정착하게 된 배경과 특성 등을 분석하였다. 설렁탕 등의 탕국과 갈비 등의 음식문화 확산 이유도 조명해 보았다. 탕과 갈비문화의 고려시대는 몽골 영향으로 쇠고기 문화가 이입되어 확산되고, 조선시대는 개성과 한양의 설야멱, 너비아니와 서울의 설렁탕 문화와 수원유수부의 왕갈비문화가 꽃을 피운다. 개성과 한양에서는 양반과 백성들이 장국밥, 설렁탕을 즐겨 먹었다.

전통적인 제례나 자연지리 조건 등에 따라 음식 정체성이 정립되는 한편 국제화(國際化)의 교류 영향을 받아 강한 혼종성문화로 정착됐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의 상호 교류 속에 한국적 음식문화로 변동되어 토착화 되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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