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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국방정책 방향 : 영의정 이원익 국방정책 사례를 중심으로

현곡 이종수 2018. 9. 23. 14:31


이글은 2018년 9월, 광운대 '선진국방연구' 창간호 게재본임. 무단 인용을 금함.

미래의 국방정책 방향

- 영의정 李元翼 국방정책 사례를 중심으로 -

Ori's National Defense Policy Analysis

 

이종수(중앙대)

< 국문 요약 >

이 글의 연구목적은 오리(梧里)의 국방정책 사례 분석을 통하여 兩難(壬亂丁酉再亂)국방정책 효과와 주요 시사점을 도출하는 데 있다. 연구의 주요 내용은 선조인조대의 오리 이원익(李元翼, 15471634) 관련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전시 체제의 조정에서 관찰사와 정승을 지내면서 전투지휘, 후방지원, 민생대책, 외교활동 등의 다양한 公務를 직접 처리하면서 전란 극복을 위하여 다른 누구보다도 지대한 기여를 했던 양난 대응내용을 분석한다. 임란시기 오리의 국방 정책(National Defense Policy)이란 국가 안전 보장 정책의 일부로서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침략에 대해 국가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사, 비군사에 걸쳐 각종 수단을 유지, 조성 및 운용하는 정책이었으며, 그러한 그의 정책과 행정의 기본은 부동심(不動心)과 공변(公遍, 공평무사, 公私正邪의 구분) 마인드였다. 오리는 서검재(書劍齋, 향교와 서원에서 유생들의 문무연마를 제도화 함)를 제정하여 무예, 징집문제 측면의 대응을 모색하고, 군사모집, 군량조달, 명과 왜와의 외교와 정보 탐색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분석 결과 주요 효과와 시사점을 오리의 국방정책의 국사정책과 비군사 정책 측면에서 도출하고, 무관 포폄사례와 효과, 시사점, 문무겸전 리더십, 부동심 스토리텔링 및 현대적 활용측면에서의 발전과제를 8가지로 구분하여 제안하였다.

 

주제어 : 梧里, 임진왜란, 국방정책, 不動心, 오리 스토리텔링   

 

- 目 次 -

. 들어가는 글

. 오리 이원익 국방정책의 의의

. 오리의 국방정책 집행사례 분석

. 오리의 국방정책 효과 스토리텔링

. 나가는 글

참고문헌

 

. 들어가는 글

 

본 고의 연구목적은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의 국방정책 기조를 토대로 군사 및 비군사 정책특성을 고찰하여 전시(戰時)의 국가체제 변화와 성과를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현대적 국방정책 방향을 제언하는 데 있다(이종수, 2015.2).

연구의 주요 내용은 양난(壬亂丁酉再亂)기 국방정책과 관련 선조인조대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15471634) 관련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전시 체제의 조정에서 관찰사와 정승을 지내면서 전투지휘, 후방지원, 민생대책, 외교활동 등의 다양한 公務를 몸소 처리하면서 전란 극복에 다른 누구보다도 지대한 기여 내용을 분석(이정철, 2013 ; 신병주, 2012 ; 송양섭, 2006 ; 이종수, 20142017 ; 이서행, 1990 ; 이영춘, 2012 ; 권기석, 2012 ; 이성무, 2012 ; 김학수, 2012)하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는 오리 이원익의 국방정책 사례 분석을 통하여 兩難期 국방정책 효과와 주요 시사점을 제언한다. 오리의 국방 정책(National Defense Policy)이란 국가 안전 보장 정책의 일부로서 외부로부터의 위협이나 침략에 대해 국가의 생존을 보호하기 위하여 군사, 비군사에 걸쳐 각종 수단을 유지, 조성 및 운용하는 정책(국방과학기술용어사전)이라고 했을 때, 영의정 이원익의 정책실행과 개인적 특징을 바탕으로 전란이란 효과적인 군사적 대응과 극복 사례를 활용하여 향후 국방정책의 전략적 방향과 근원적인 문제해결에 필요한 이슈를 강구한다.

본 연구의 방법은 오리의 왜란 기간의 여러 활동을 국방정책 중심으로 살펴보고(권기석, 2015), 전시 국가체제 유지에 있어서 주요 역할과 성과, 주요 시사점을 제시한다. 이를 토대로 兩難의 극복 원동력을 규명하고자 한다. 주요 핵심은 국방정책 전반과 인사 포폄정책의 시사점, 부동심과 수기를 통한 정신통제 중추로서 오리의 부동심과 공변(公遍, 공평무사, 公私正邪의 구분) 사상 등을 제시하고, 민본 리더십, 공명정대 부동심 유비무환, 국방 인사 공정성 제도화 방안 등을 제안한다.

 

. 오리 이원익 국방정책의 의의

 

1절 이원익의 주요 국방정책

 

1. 국방정책

 

첫째, 오리의 서검재(書劍齋)1953년부터 1637년까지 40여 년 동안 평안도에서 운영되었다(김영호, 2015 : 17). 오리는 서검재(書劍齋, 향교와 서원에서 유생들의 문무연마를 제도화 함)를 제정하여 무예, 징집문제 측면의 제도를 개혁한다. 오리는 전쟁대비와 군기확립을 위하여 평소 음식을 절제하고, 몸소 갑옷을 입고 무예를 연마하였다. 영의정 허적은 아뢰기를 "이 법이 매우 좋으니, 본도로 하여금 옛 규례를 거듭 설명하여 각 고을이 모두 이에 따라 시행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착실히 거행하라고 칙사가 돌아간 후에 분부하라." 하였다(비변사등록, 숙종 216760124()). 文敎武備의 근본이라고 했다(김영호 : 21).

둘째, 군사, 군량 조달 측면을 보면, 먼저 오리는 군무에 있어서는 대중을 통솔할 재능을 가진 장수는 없고 변방에는 지친 군사들의 탄식만이 있어 아무리 격려하고 타일러도 軍心이 점차 흩어져서 모든 일을 소홀히 하고 있으니, 매우 염려스러웠다면서, 그래도 各營에는 각기 隊伍를 조련시키는 규율이 있었는데, 慶州·星州·安東 4고을에서 수령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이원익은 전쟁 수행에 군량조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호조의 전세미나 비축미를 과감히 방출하여 군량 공급을 함으로써 전투력을 증진시킬 것을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이원익은 전쟁으로 백성들의 희생이 많았기 때문에 민심을 위한 정책을 건의하고 병기를 갖추는데 힘쓸 것을 역설하는 한편, 군량군수품 조달을 독려하여 제독부(提督府)로 운송하도록 하였다. 그는 군사들 중 일부를 평양에서 황주 간의 곡식 운반을 책임지게 했으며 한편으로는 선박을 통해 황해도로 운반하였다. 아울러 성벽을 수리하거나 명으로부터 화포 등에 대한 관련기술을 전수받았다.

셋째, 충무공 관계이다. 이원익은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만나 완벽한 군비태세를 보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치하하였다. 이때 잔치가 벌어진 방산(蒡山)을 병사들은 정승봉(政丞峯)으로 불렀다고 한다. 전란기 이원익과 이순신의 인연 또한 각별하였다. 이원익이 행정에 빈틈없고 군율에 엄격했던 점을 감안하면, 휘하의 장병들에 대해 엄격한 군율을 적용시키고 빈틈없이 전쟁 준비를 하는 이순신은 매우 흡족한 장수였을 것이다. 이원익과 이순신의 인연에는 두 사람을 모두 추천한 유성룡이 있었다. 이원익은 유성룡이 조정을 떠난 이후로 유성룡의 제자인 정경세이준최현 등 영남 남인들을 적극 후원하여 조정에서 기반을 유지하도록 하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이순신을 거제에 주둔시켜 일본군의 동태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응토록 하였으며, 곽재우로 하여금 해변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이원익은 각종 군비수축, 병력배치, 인사운영 등 군사부문에 있어서 다방면에 걸쳐 남다른 식견과 수완을 보여줬다.

이순신이 한 때 지휘권을 박탈당하고 백의종군하였다가 다시 기용되어 정유재란 때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에는 이원익과 같은 인물들이 끝까지 지원한 것도 큰 바탕이 되었다. 이순신 역시 이원익의 후원에 깊은 감사의 뜻을 표시하였다.

넷째, 긴박해진 상황 속에서 적 일본 진영에 다녀온 僧將惟政과 문답하였는데 그 중 분통한 말이 많아서 차마 기록하지 못하고 비변사로 유정을 직접 올려 보내기도 했다. 또한 下四道에서 부모가 적의 손에 살해당한 이를 모집하여 구성된 奮義復讎軍의 지휘체계도 체찰사 오리에게 일원화하여 募兵行軍 절차를 지휘 독찰하게 되었다.

끝으로, 엄격한 군율과 치죄 측면이다. 元均7월 칠천량 해전에서 패배한 이후 오리는 奔潰將官들을 군법에 의해 치죄하지 않아 오늘날 달아나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면서, 원균을 비롯한 패주한 장수의 처벌 문제를 도원수 권율과 의정하여 치계하였다. 특히 원균은 主將이었으니 군사를 상실한 군율로 처단하자고 청하고, 이하 수령과 변장도 등급을 나눠 죄를 주기로 하였다. 이원익은 엄정한 군율을 강조하여, 김경서(金景瑞)가 군량을 운반하라는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자 군문에 잡아다가 무겁게 결장(決杖)하였다. 또한 명나라의 전사자를 위하여 기자묘에서 제사를 지내 명나라 군대의 전사자를 위로하고 부의물(賻儀物)을 내려 명군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힘썼다. 한어(漢語)에 능했던 점 또한 이원익이 명나라 관리를 대하는데 큰 이점으로 작용했다.

 

2. 비군사정책

 

첫째, ‘出將入相정승, 관찰사 이원익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전시 체제의 조정에서 관찰사와 정승을 지내면서 전투지휘, 후방지원, 민생대책, 외교활동 등의 다양한 公務를 몸소 처리하면서 전란 극복에 다른 누구보다도 지대한 기여를 했다. ‘出將入相이라는 말 그대로 선조의 곁에 있을 때는 여러 방략을 강구하여 제시한 재상이었지만, 곁을 떠나면 전투를 지휘하고 병력과 군량을 모집하는 장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왜란 발발초기 몸소 전투를 지휘하며 御駕北邊의 끝인 義州까지 호종한다. 전시의 정승 신분으로 중앙조정에서 국왕을 직접 보좌하기 보다는 남방의 體察使로서 전쟁터 순행 등 실질적인 전방의 총지휘관 역할과 丁酉再亂(1597)을 앞두고 또다시 전투가 격화된 이후의 위기 관리자 등으로 점철된 인물이다.

15924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梧里는 전쟁 수행과 관련하여 중임을 맡는다. 선조는 서쪽으로 파천하기에 앞서 오리를 평안도의 都巡察使로 삼아 먼저 떠나게 하였다. 오리가 서울을 떠날 때 실록에 나오는 그의 직임이 徵兵體察使였다는 데서도 드러나듯 그는 직접 병력을 이끌고 적과 교전하는 장수라기보다는 민심을 수습하여 후방을 안정시키고 병력과 군량 등을 보급하는 역할을 부여받고 있었다.

선조는 62일 여러 대신을 인견하였는데, 이원익은 평양수호책의 입안을 요구하면서, 평양성을 죽음으로 지키든지, 그렇지 못하다면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편의에 따라 조치할 것인지를 빨리 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선조는 이미 義州江界로 떠날 것을 생각하고 있었으나, 성 안의 인심을 고려해 달라는 이덕형의 의견을 듣고는, 이원익에게 평양성을 지킬 수 있겠는지를 물었다. 이에 오리는 기피할 수 없다고 답했다.

둘째, 대동법 시행측면이다. 공물을 지방의 특산물 대신에 쌀로 납부하자는 수미법(收米法) 논의는 선조 시대 이이 등에 의해 이미 제기되었다. 수미법은 군량미 해결과 민생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제기되었지만, 기존에 특산물을 대신 납부하고 이익을 취하는 방납인의 반발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방납의 폐단이 결국은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증가시킨다는 점을 인식하고, 공물을 쌀로 받는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한 것이다. 대동법은 전국적인 실시가 아닌 단계적으로 실시되는 방식이었다.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려 하였다.

오리의 주장은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의 방납인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 십 배, 몇 백 배가 되어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되었는데, 기전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을 설치하여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1결당 매번 8말씩 거두어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에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말 가운데 매번 1말씩을 감하여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삼게 하고,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것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과 조사의 일에는 이러한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 결 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

셋째, 민폐의 개선과 민심 안정이다. 오리는 병란 이전부터 수령이 어질지 못하여 백성이 침학을 받았는데, 병란 이후로는 더욱 무휼하지 않아 백성들이 살기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어져 거의 다 고향을 떠나 일정한 거주지와 가족이 없어졌다고 보았다. 법이 시행되지 않으니 명령해도 가지 않고 왜적을 막게 하면 줄곧 달아나며, 不逞한 사람이 돌봐주면 도적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오리는 사족이 국가의 元氣로서 전란 극복의 선도적인 역할을 하더라도,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보았다. 그는 선조에게 다음과 같이 간곡히 아뢴 바 있다.

사람들에게 삶을 즐거워하는 마음이 있은 연후에야 윗사람을 친애하며 목숨이라도 버리는 법입니다. 이미 恒心이 없고 보면 아무리 그들을 엄중한 법으로 묶어놓는다 해도 태연히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모두 떠나버릴 계획만 갖고 정착해 있을 마음을 갖지 않을 것이니, 한번 고향을 떠나고 나면 바로 도적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백성의 생활이 곤핍하다는 말은 곧 선비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고 성상께서도 필시 이 일을 보통일로 생각하고 계실 것입니다. 지금 신이 직접 자세히 보고 왔는데 왜가 물러간다 하더라도 국가의 근본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크게 걱정스럽습니다. 일체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것을 염두에 두소서.

넷째, 오리는 小民보다는 양반의 선도적 역할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그가 평소 백성은 오직 국가의 근본이니 조정에서는 이 점을 절급한 임무로 삼아야 하며, 기타의 일들은 餘外의 일이라 하면서도, 이른바 大家世族의 역할에 대해서는 선조에게 아래와 같이 설명하였다.大家世族들의 문제에 있어서 평상시에는 豪强이라고 불려 졌었지만 오늘날 시점에서 그들을 보건대 그들이야말로 국가에 관련되어 있는 것이 크다고 하겠습니다. 소민들은 물고기나 새같이 놀라 흩어졌어도, 士族들은 동요하지 않았으니 일국의 元氣가 될 만합니다. 당초 변란이 일어나던 시기에 군사를 모아 의병을 일으킨 자들이 모두 이 사족이었으니 이로써 인심의 向背가 정해졌습니다. 이 점을 심상히 보지 말고 국가가 그들을 알아주어야 할 것입니다.

 

2절 이원익의 개인적 특성

 

1. 개인역량 및 특성

 

첫째, 중국어 능력이다.연려실기술에는, ‘이원익이경석(李景奭)이 모두 한어(漢語)를 해득하였으므로, 제조가 되어 사역원 관원이 오면 반드시 한어로 수작(酬酌)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경리(經理) 양호와도 직접 대화하면서 군량을 조달할 때도 이원익의 외국어 능력은 힘을 발하였다. ‘공이 한어(漢語)에 능통했던 관계로 임기응변을 제대로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인데, 이와 같은 경우가 허다하였다.’는 지적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이원익은 중국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기에 중국인과의 은밀한 대화가 가능했다. 이원익은 安州에서 열린 중국 사신과의 餞慰宴이 파한 후 중국 사신은 이원익은 華語를 이해한다는 말을 듣고는 通事를 시켜 말을 전하지 않고 신을 자기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여 무릎을 마주하고 앉아서 은밀한 말을 전했다.

둘째, 가문적 배경으로는 이원익의 본관은 전주(全州)로 종실의 일원이었다. 그의 고조는 태종의 아들 익녕군(益寧君) 이치이고 증조는 수천군(秀泉君) 이정은(李貞恩), 조부는 청기수(靑杞守) 이표(李彪), 아버지는 함천정(咸川正) 이억재(李億載). 어머니는 사헌부 감찰 정치의 딸이다. 이원익의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셋째, 이원익이 영의정에 임명된 이유를 당시의 사관은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이원익은 충직하고 청백한 사람으로 선조 때부터 정승으로 들어가 일국의 중망을 받았다. 혼조 시절 임해군의 옥사 때 맨 먼저 은혜를 온전히 하는 의리를 개진하였고, 폐모론이 한창일 때에 또 상차하여 효를 극진히 하는 도리를 극력 개진하였으므로 흉도들이 몹시 그를 미워하여 목숨을 보전하지 못할 뻔하였다. 5년 동안 홍천에 유배되었다가 전리에 방귀되었다. 이때에 와서 다시 수규(首揆)에 제수되니 조야가 모두 서로 경하하였다. 상이 승지를 보내 재촉해 불러왔는데, 그가 도성으로 들어오는 날 도성 백성들은 모두 머리를 조아리며 맞이하였다.

끝으로, 이원익의 일생을 압축한 졸기에 보면,원익은 강명하고 정직한 위인이고 몸가짐이 청고(淸苦)하였다.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였는데 치적(治績)이 제일 훌륭하다고 일컬어졌고, 관서(關西)에 두 번 부임했었는데 서도 백성들이 공경하고 애모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선조 조(宣祖朝) 때 내직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지만 얼마 안 되어 면직되었고 광해군 초기에 다시 재상이 되었으나 정사가 어지러운 것을 보고 사직하고 여주(驪州)에 물러가 있었으므로 임해영창의 옥사에 모두 간여되지 않았다. 적신 이이첨 등이 모후(母后)를 폐하려 하자, 원익이 광해에게 소장을 올려 자전께 효성을 다할 것을 청하니, 광해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효성을 다하지 못한 일이 없는데 원익이 어찌 감히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군부(君父)의 죄안(罪案)을 만들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홍천(洪川)으로 귀양 보냈는데, 대체로 그의 명망을 중하게 여겨 심한 형벌을 가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2. 정책 이념

 

이원익의 성리학적 수기치인 사상을 행정, 재물, 대민, 수양관 및 윤리관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첫째, 정치 행정관이다. 오리의 생애와 사상을 통하여 나타나는 도학적 행정특징(이성무, 2012 ; 이영춘, 2012)의 요체는 정확, 신속, 간명, 현장중심 행정(이영춘, 2012 : 6)이었으며, 그 토대는 공명정대와 온건행정이었다. 가는 곳마다 지역중심, 현장중심 행정, 문제해결중심 행정으로 중앙, 지방행정의 불난 곳찾아 직접 불을 껐다(이종수, 2015).

둘째, 재물관이다. 양난(임진, 정유년) 이후 공신으로 책봉(호성 공신 등)되자, 선조가 토지를 마음대로 점하라고 하자, 그는 바늘을 가지고 오라고 하여 바늘구멍(돗자리 짜는 바늘)으로 보이는 곳만 취했다고 전해진다. 재물욕심이 없던 그는 스스로 짚신을 꼬아서 신고 지붕으로 쓸 만큼 청렴하였다. 오리에 대한 평가는 청렴하였으며 사심이 없었다고 했다.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했다(함규진 외 : 41-42). 임금에게도 제향의 규모를 줄여야 한다고 직언했다. “백성이 편하지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 나부터 먼저 백성을 사랑하고 물건을 아끼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야 한다. 상벌에 공평무사하면 백성이 기뻐한다. 오직 공명정대해야만 사람을 복종시킬 수 있다. 사람의 마음을 얻는 데는 그 방법 외 다른 것이 없다.” 세상을 다스리는 데는 백성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한 것이 없고, 몸을 닦는 데는 욕심을 적게 하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이영춘, 2012 ; 권기석, 2012 ; 이성무, 2012 ; 김학수, 2012)고 했다.

셋째, 대민관으로 오리는 인조에게 풍속교정을 安民중심으로한 대안을 제시했다(이영춘 외 : 239 ; 함규진 외, 2013). 오리는 조선시대 역대 고위관료 중 대학8조목을 이룬 이상적 인간상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일을 처리할 때 그 실정을 정확히 파악할 것을 무엇보다 중시하였다. 그는 천하의 사정에 정통하면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古訓曰: 通天下之情, 然後能成天下之務.”( 梧里集補遺 雜著, 書與孫守約赴延豐縣)는 옛 교훈을 들기도 하였다. 이원익이 정책 이념으로 삼은 내용은 논어에 나오는 安人節用而愛人’, 맹자에 나오는 恒産保民’, 서경에 나오는 民惟邦本, 本固邦寧’, 주자 등이 강조한 公私觀 등과 같이 유학자에게는 널리 알려지고 평범한 내용이었다. 대동법은 유학의 이상인 안민을 제도로 구현하여 경세제민이라는 치인의 업적을 이룬 것이었다. 이원익의 업적은 정치·군사·경제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경세제민의 이념으로 종합될 수 있다.

넷째, 인적 심신 수양의 핵심은 부동심(不動心)과 완평(完平)이다(함규진, 이병서, 2013). 완평심(完平心)은 모자람이 없고, 치우침이 없는 정신 자세로 그는 오랜 수양을 통해 마음을 잘 닦아 거울처럼 모자라거나 이지러진 부분이 없도록 다듬었다(함규진 외 : 423). 꾸준한 약물 복용과 철저한 자기관리가 핵심이었다. 주량도 쎘으나, 색은 멀리 했다(이영춘, 2012 : 8). 허목은 상국의 명성과 공로가 온 세상에 퍼졌다. 그 마음을 찾아보면 바로 한결같음이다(不動心). 한결같기 때문에 밝으며, 밝기 때문에 신념을 갖게 되고, 신념을 갖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오리의 삶은 부동심(不動心)과 인()의 실현적 삶이었다(유호진, 2005). 내면성찰에 따른 부동심(不動心)’과 조상, 가족, 군주, 백성, 종에 대한 인()의 실현적 삶으로 혹자는 오리의 시를 大人라고 평했다.

다섯째, 공직(행정)윤리 측면이다. 梧里先生文集補遺雜著에는 수령으로 재직하는 생질 이덕기에 보낸 서증이생덕기지임書贈李甥德沂之任과 연풍현감으로 부임하는 손자 이수약에게 보낸 서여손수약부현풍지현書與孫守約赴延豐縣戊辰이 있다. 이것들은 지방 통치를 위한 절실한 지침서이다. 전자에서는 중용이라야 일을 이룰 수 있고 天下萬事人心이 근본이고,” “나의 마음을 먼저 인민을 사랑하고 재물을 아끼는(仁民愛物) 데에 위주로 삼고 상벌과 호령을 공평무사하게 하면 인심이 저절로 기뻐한다.”는 통치의 기본원리를 제시한다. 후자에서는 아들이 수령으로서 청렴과 간명함으로 인민을 보전(以廉簡保民)한 자세를 손자가 계승하기를 바라고 세상을 다스리는 데에 인민을 사랑하는 이상의 일은 없고 몸을 닦는 데에는 욕심을 적게 하는 이상은 없다(治世莫若愛民.養身莫若寡欲.),” “천하의 인정에 통하라(通天下之情),” “이익이 되는 일보다 폐단의 제거가 중요하고 일을 만드는 것도 줄이는 일이 중요하다.(興一利不如除一弊.生一事不如省一事라는 선인의 교훈 등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수기치인으로 집약된다.

이상을 정리하면 오리의 도학적 청렴행정(道學的 淸廉行政)이란 인()과 의()를 중심으로 한 부동심(不動心), 청정(淸淨), 청렴(淸廉), 불편부당(不偏不黨, 公遍), 안민제일주의(安民第一主義) 등의 실천과 현장과 백성 중심의 안민행정(安民行政)이라고 잠정적으로 정의 할 수 있다(이종수, 2015.2).

 

3절 선행연구와 분석의 틀

 

1. 선행연구

 

첫째, 오리의 국방정책을 연구한 논문은 권기석(2012), 김영호(2015), 김학수(2012), 송양섭(2006), 신병주(2012), 유완상 외(1998), 이영춘(2012), 이양희(2005), 이정철(2010), 허권수(2005), 함규진 외(2013) 등을 들 수 있다. 이 연구물들은 대체로 오리의 임난극복 정책과정과 결과 및 구체적인 군사, 군량, 경제, 민생, 외교, 賊情 情報, 남인관계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있다.

둘째, 이종수의 관료병(2012, 2013, 2014)은 오리의 청렴 정신을 어떻게 현대 관료제에 적용하여 청렴 국가를 이룰 것인가를 다루고 있으며, 동시에 오리의 청렴체험 효과와 그 가능성을 설문조사를 통하여 검증하고자 하였다(이종수, 20142017).

 

이상의 내용을 < 1 >에 정리한다.

< 1 > 선행연구 분석

구 분

선행연구 분석과 차별성

연구목적

연구방법

주요 연구내용

유가수양법과관료병 치유

권기석(2012), 오리의 임난 극복.

질적 접근

임란과 오리의 역할

김영호(2015), 오리의 서검재

문무겸전 교육

김학수(2012), 학자관료 오리

오리와 남인 학계

송양섭(2006), 임란과 오리

오리의 군사정책

신병주(2012), 국난과 오리

전란시 오리 대응

이종수(2017), 오리의 인성교육

유가 힐링

이종수(2016), 오리 청렴체험 교육 효과 검증

설문조사

유가 힐링 검증

이종수(2014.6), 관료병의 도가 스토리텔링 힐링

질적 접근

도가 힐링

이종수(2014.7), 영의정 이원익의 도학적 행정사상 분석

오리의 유가적 실천행정

유완상 외(1998), 경세가 오리대감

임난과 오리 대응

이영춘(2012), 청백리 오리

청백리 대감

이양희(2005), 오리와 군사관계

임난과 오리 대응

이정철(2010), 오리와 경제 정책

오리와 경제정책

허권수(2005), 오리와 남인 관계

남인과 오리 관계

본 연구

임난시 오리의 군사 정책 분석

질적 접근, 사례분석

오리의 군사, 비군사 정책 사례 분석과 과제 제안

 

2. 분석의 틀

 

본 고의 분석의 주요 내용은 선조인조대의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 국방정책 관련 사례를 군사, 비 군사정책 중심으로 분석하고, 민본 리더십, 공명정대 부동심 및 포폄제도 시사점 등과 유비무환, 국방 인사 공정성 제도화 방안 등을 제안한다. 오리의 왜란 기간의 여러 활동을 국방정책 중심으로 살펴보고, 전시 국가체제 유지에 있어서 주요 역할과 양난 대응 결과 및 현대적 시사점을 분석하고자 한다.

 

. 오리의 국방정책 집행 사례 분석

 

1절 국방정책 특성 분석

 

1. 국방정책

 

(1) 군사 활동

 

첫째, 오리는 이순신(15451598)과 곽재우(15521617)를 발굴했다(이양희, 2005 : 74-75). 이순신을 거제에 주둔시키고, 곽재우를 해변에서 수비케 한다(宣祖實錄82, 선조 29, 11己亥 ; 유성룡, 징비록2 ; 이정철, 2013 : 168). 또 영남 출신으로 지리와 인정에 밝은 순찰어사 정경세(15631633)를 영남지방의 산성수축 임무에 배치하도록 건의했다. 오리의 군비수축, 병력 배치, 인사 운영의 식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이양희 : 75). 오리는 임진왜란 시 백성을 지키고, 이순신을 지지했다(이정철, 2013 : 166). 오리의 이순신 평가측면은 이순신은 경상도 장수 가운데 가장 훌륭하다”(이정철 : 171). “적이 두려워하는 것은 수군이요, 수군이 믿는 것은 순신입니다”. “이순신은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 없었다”(신병주 : 250). 이순신은 한산에서 옮길 수 없다(박기현 : 56). “이순신은 임기응변하여 신출귀몰한 비법을 쓰고, 사졸들은 사력을 다하여 큰 공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갑자기 유탄을 맞았다(오리선생문집1; 신병주 : 249). 한산도에서 이순신을 만나 완벽한 군비태세를 보고 소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 병사들을 치하 하였다(신병주 : 248). 그 봉오리를 영상봉(政丞峯)이라고 했다(이양희 : 74 ; 宣祖實錄65, 선조 287; 이원익, 梧里集續集附錄 2, 行狀權愈 ; 이순신, 亂中日記을미년 8월 정묘).

둘째, 이순신의 오리대감 평가다. “군사들로 하여금 목숨을 아끼지 않도록 한 것은 상국(相國)의 힘이라고 했다(오리선생문집2 ; 신병주 : 250).

셋째, 이원익은 남명과 퇴계의 후학들을 깊게 신뢰했다(신병주, 2012 : 250). 망우당 곽재우와는 임진왜란 때 작전을 논의하면서 왜적을 함께 물리쳤는데, 그는 곽재우의 건의를 많이 받아 들였다(허권수 : 14). 곽재우는 홍의를 입고 병사를 지휘했다(이서행 : 380). 임진난시 영남권에 미친 이원익의 영향력은 퇴계, 남명 학파권을 망라했다. 주요 인사는 곽재우, 정구, 김우옹, 정경세, 이준, 정온 등이다(김학수, 2012 : 3). 곽재우는 조식의 외손서였다.

 

(2) 병사의 모집과 군량의 확보

 

오리가 주로 담당한 것은 전투보다도 현지의 군사를 모으는 일이었다. 오리는 강변에서 6백여명의 土兵을 모은 실적을 선조에게 보고하면서, 이들이 남쪽 군대와 달리 잘 쓰면 예전의 군대와 같이 潰散에 이르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또한 이전에 평양성에서 江灘을 지키지 못한 일에 대해서는, 물이 몹시 얕고 토병의 숫자가 매우 적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였다. 이어서 明軍軍糧을 대는 문제와 함께 명군과 협력하여 평양에 진공하는 시점 등에 대해서도 논의하였는데, 이원익은 밤을 틈타 불을 질러서 공격하는 전술과 함께, 남쪽 군사들보다는 土兵의 전투력을 높게 보고 남쪽 군사에게 군량 운반을 맡기는 계책 등을 제안했다. 군사를 모아서 전투력의 수준에 따라 적절히 운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오리는 군량을 조달하여 병사들에게 나눠주는 데에 주력했다. 전쟁 초기부터 오리는 각 고을에서 군량을 지급하고 있으나 도로가 멀어 굶주리는 자가 많다면서, 비변사에서 강변의 土兵은 술고기와 면포를 주어서 구휼한다는 뜻을 보였으나, 유독 內地의 군대에게는 남의 나라 사람을 보듯 하고 있으니, 호조로 하여금 田稅나 창고에 저장된 쌀과 콩 등을 지급하게 해 달라고 청했다. 군사를 거느리고 군량을 운반하라는 분부를 제대로 실행하지 않은 金應瑞를 이원익으로 하여금 처벌하도록 한 비변사의 조치에서도 군량 조달의 책임자로서의 위상이 느껴진다.

15932월 평양성을 포위하고 있던 군사 중 상당수가 사실상 도망병이 되어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어 버리자, 비변사에서 그 책임을 물어 도원수 김명원과 순찰사 이원익을 推考하도록 요구하기도 했는데, 이원익에게 병력 관리의 책임이 물어졌음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군량 조달의 미비는 병사의 도망으로 이어졌으며, 서울의 왜군이 위축되고 명군의 進就가 부진한 상황에서 평안도 출신의 무사들은 군량이 다하여 도망쳐 돌아가는 자가 많아지자, 이를 대체하는 정예병 300명을 쇄출하여 엄선하는 임무가 이원익에게 맡겨지기도 했다. 이렇게 병사의 모집과 군량의 확보는 어느 한 쪽을 폐할 수 없는 중요한 과제였다.

(3) 군사 훈련

 

이원익은 모병 뿐 아니라 군사 훈련에서도 남다른 재간을 보여주었다. 비변사가 아뢴 바에 따르면, 평안 감사 이원익만이 營府에 소속된 군졸을 초출하여 대포를 쏘고 칼 쓰는 법을 훈련시켜 완전히 익힌 자에게는 상을 주기 때문에 점차 무예가 완성되어 간다고 하며, 그 밖에는 아무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선조는 오리의 군사훈련을 칭찬하며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다른 신하에게 군병을 조련하는 등의 일은 평안감사를 본뜨도록 하라고 할 정도였다.

이원익의 군사 훈련 성과로, ‘평안도의 군병은 그가 감사로 있을 때에 이미 부서를 나누고 장수를 정하여 哨官·旗摠·隊摠을 두어 서로 통속하게 하고 포 쏘고, 창검 쓰는 기술을 가르쳐서 그 수효가 이미 많으니, 훈련을 거치지 않은 다른 도의 군사에 비하면그 차이가 매우 크다는 유성룡의 평가를 받고 있었다.

 

(4) 외교(明軍과의 협력)

 

이원익은 중국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했기에 중국인과의 은밀한 대화가 가능했다. 특히 오리가 명군이 들어오는 길목인 평안도 관찰사를 맡았던 까닭에 이러한 역할이 더욱 집중되었고, 그 결과 명의 장수들에게도 이원익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判尹 李德馨의 말에 따르면 沈遊擊(沈惟敬)이 어떤 자에게 내가 石尙書(石星)의 명을 받고 이곳에 와서 그대 나라를 위해 死生을 걸었는데 내 마음을 아는 자는 단지 布政司와 백성들뿐이다.’ 라고 하였는데, 이른바 포정사란 이원익을 가리키는 말이었다고 한다.

중국의 원병에게 충분한 곡식을 제공하는 것은 오리의 주된 임무 중 하나였다. 15932월에 오리가 평양에 있는 곡식이 4~5일 분량에 불과함을 지적하면서 兩湖의 군량을 준비하고 보병을 더 청하는 일은 늦출 수 없다고 재촉한 것이 확인된다. 오리는 각처의 군량과 마초를 운반하도록 독려하여 提督府에서 쓰도록 하였다.

선조는 159311월 중국의 總兵 劉綎과 문답한 후 그가 조선의 위태한 정상을 간파하고 있는 점에 감화되어 중국에는 劉總兵이 있고, 우리나라에는 이원익이 있을 뿐이다.” 라고 칭송한 바 있었고, 뒤에 오리의 공로를 시상하기 위해 오리의 아들이나 사위에게 관직을 제수하도록 하면서, “평안 감사 이원익의 사람됨은 내가 다시 말할 필요가 없으니, 지난날 우리나라에는 단지 이원익이 있을 뿐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라고 했다.

 

2. 비군사 정책

 

(1) 敵情戰況의 파악

 

敵情戰況의 파악이다. 오리는 이후 큰 전투에 직접 나선 것이 확인되지는 않지만, 선조의 요구에 따라 왜군의 동향을 파악하여 보고하기 위해 힘썼으며, 비변사에서도 이원익의 장계를 통해 왜군이 장차 어떤 의도를 가지고 병력을 움직이려는지 파악하고자 하였다. 오리는 주로 전쟁 수행과 관련된 종합적인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한 조치를 하고자 힘썼으며, 중요한 사항은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이러한 사례로서, 선조는 평안도 관찰사 이원익과 兵使 李薲 등에게 馳諭하여, 賊勢의 강약과 숫자 등을 비밀히 馳啓할 것을 명하고, 아울러 힘써 싸운 將士도 치계하도록 했다.

전투를 통해서 알게 된 見聞을 알리는 것도 오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였다. 中原人이 전투에 임하는 조선 관원의 옷소매와 갓을 보고 전쟁터에 싸우기에 부적합함을 지적하며 시까지 지은 일화에 대해서도 언급하였다. 그밖에 왜인의 토굴 제도, 명군의 화포, 적병의 총통, 왜군의 用兵 전술 등에 대해서도 폭넓게 논했다.

 

(2) 장병사기 앙양 및 민심안정

 

오리는 장병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휘하 장병과 공이 있는 백성에 대한 포상에도 힘썼다. 예컨대 왜군이 평양을 함락하던 날에 적을 토벌하라고 당부하고 자결한 아버지의 뜻에 따라 분전하다 죽은 金德霖에 대해 표창을 건의한 사례가 있다.

오리는 전쟁에 공로가 있는 자는 병사 뿐 아니라 지역민에게도 포상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보고하였는데, 이는 지방 사회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15936월 이원익은 中和 사람들이 종시 적에게 따르지 않고 村夫野老까지도 힘을 다하여 싸웠다면서, 적을 많이 죽이고 왜적에게 입은 피해도 컸을 뿐 아니라, 적을 토벌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아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으므로 과거를 따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아뢰었다.

 

(3) 잠상 금지와 문교정책

 

이원익은 왜인과의 潛商을 금지하는 데도 힘썼다. 그는 서장을 올리면서 잠상 문제를 금지한다고 조정에서 거듭 밝혔고 두 번 세 번 檢飭했는데도 右兵使 金應瑞는 전연 거행하지 않았다면서 지금 晉州에 와 있는데 각별히 禁防하게 하겠다고 보고했다. 잠상의 무리는 왜인의 心腹 노릇을 하여 난처한 일이 많기에 특별히 금단하고자 한 것이다(권기석, 2012).

동시에 그는 書狀을 올려 이르기를, 는 어느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는 것이고, 文敎武備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병란이 일어난 이래로 문교가 없어져 經典詞章 모두 여염에서 들어보기 어렵고 세상 풍습이 날로 투박해지고 있으니 매우 한심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비를 모아 詩才하여 그들의 뜻을 진작하려 했으나 영남은 왜적이 변방에 웅거하고 있어서 거행하지 못하였고, 이번 羅州를 순찰하는 길에 試才하여 入格한 사람을 포상하였으며, 全州와 충청도 중앙 지역의 고을을 순찰할 때도 시재하려고 계획 중이라 보고하였다.

 

(4) 관리의 자질에 대한 논평

 

첫째, 장수들의 자질과 인품에 대한 논평도 있었다. 통제사 이순신에 대한 생각을 묻는 선조에 대해, 그 사람은 힘써 종사하고 있을 뿐 아니라 閑山島에는 군량도 많이 쌓였다고 답했다. 당초에는 왜적을 부지런히 사로잡았다가 후에 태만한 마음이 없지 않았다는 선조의 평가에, 이원익은 많은 장수들 가운데 가장 쟁쟁한 자이며 처음과 달리 태만해졌다는 말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일축했다. 節制할 만한 재질이 있느냐는 선조의 의구심에 대해서는 경상도에 있는 많은 장수들 가운데 순신이 제일 훌륭하다고 여겨진다는 말로 답했다.

둘째, 오리는 장수로 삼을 만한 인재를 선발하고, 軍功이 있는 자를 포상하는 데 힘썼다. 오리가 추천한 인물로서 白士霖이 있었고, 元均은 성질이 매우 거세어서 上司文移하고 節制하는 사이에 반드시 서로 다투는 문제가 있지만, 전투에서는 매우 기용할 만하다고 하였다.

셋째, 수령의 賢否에 대해서도 상세히 논하였다. 전라도는 이미 狀啓한 대로 康復誠李福男이 잘하고 있다고 하였다. 특히 이복남은 슬기로운 사람이라 장수로 삼을 만하다고 했다. 또한 형벌을 지나치게 써서 自用하는 병통이 있었고, 羅州에도 을 설치하여 군사 3백 여 명을 두고 兵使와 결속시켜 援兵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일을 마치지 못하고 올라왔다면서, 수령을 오래 맡기면 모든 일을 잘 다스릴 수 있지만 자주 바꾸면 일을 할 수 없을 것이니, 그대로 머물러 두고 兵使로 차출하지 않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 건의하였다.

끝으로, 이원익이 체찰사 때의 경험을 회고 형식으로 쓴 다음의 기록에는 당대 그와 교유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잘 나타나 있다.나는 체찰사로 영남에 있은 지 오래다. 정승 유성룡은 내가 공경히 섬긴 분이며, 노경임(盧景任)은 명민(明敏)하고 경()에 힘을 쓴다. 곽재우는 더러 잘못한 일은 많으나 호협하고 의리를 좋아하였는데, 나의 책망을 받으면 얼른 깨닫고 종시 나를 섬겼다. 김우옹은 유아(儒雅)하고 직량直諒) 하였는데, 정인홍을 멀리 피하여 기전(畿甸)을 떠돌았다. 이상 몇 군자는 지금 다 볼 수가 없으니 때로 생각이 떠올라 슬픔을 견디지 못하겠다. 이순신은 충용하고 지략이 있었는데 유성룡이 그를 나라에 추천하였다. 원균이 한산도에 와서 크게 패하니 이로부터 비로소 망해갔다. 이순신은 왕명을 받고 갔는데 적병이 또 크게 이르렀다. 이순신은 임기응변하여 신출귀몰한 비법을 쓰고 사졸들은 사력을 다하여 큰 공이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갑자기 유탄을 맞았다.

 

3. 무관 포폄 사례

 

전란 시 무관장리 사례 분석을 통하여 武官 부패상을 진단하고, 이원익 청렴행정 스토리텔링 힐링 방안 모색을 위한 주요 내용은 조선중기 조선왕조실록사료 등에서 14개 사례를 분석하였다.

관료들에 대한 포폄 건과 관련 수령 장리에 대한 포폄의 요청 주체 측면에서는 사헌부 4, 사간원 3, 의금부 3, 전교 1, 호조 1, 비변사 1, 오리 이원익 1건 등으로 사헌부-사간원 -의금부 순으로 장오죄를 밝혀내어 처벌하고 있다(이종수, 2016). 대상자 신분은 병사 등 무관이 10건 이상으로 나타났으며, 처벌 사유로는 대다수가 장죄로 불법적 미곡징수 번포 징수 등이며, 기타 탐학 재물 탐욕 등이다. 결과 측면에서는 파직 2, 대신과 부처 위임, 기타 등이며, 정배 석방 체차 몰수 교체 성명 삭제 등이 각각 1건씩으로 결정되고 있다.

 

. 오리의 국방정책효과 스토리텔링

 

1절 국방정책 효과

 

1. 수미법, 유비무환

 

공물을 지방의 특산물 대신에 쌀로 납부하자는 수미법(收米法) 논의는 선조대 이이 등에 의해 이미 제기되었다. 수미법은 군량미 해결과 민생안정을 위한 방안으로 제기되었지만, 기존에 특산물을 대신 납부하고 이익을 취하는 방납인의 반발 등으로 인하여 본격적으로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원익은 방납의 폐단이 결국은 백성들의 부담을 크게 증가시킨다는 점을 인식하고, 공물을 쌀로 받는 대동법의 실시를 주장한 것이다. 대동법은 전국적인 실시가 아닌 단계적으로 실시되는 방식이었다. 경기도에 시범적으로 시행하고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하려 하였다. 그러나 각 지방의 특수성을 고려한 시행세칙의 미비, 지주와 방납인의 반대 등으로 전국적인 시행은 보지 못하였다.

1117, 右議政 兼江原忠淸全羅慶尙等道 都體察使로 임명된 오리는 서울에서 떠나면서 선조를 인견하였는데, 이에 따라 방비책을 세우며, 민생을 안정시킬 대책에 대해 논의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적의 침범에 대비하여 전략을 예측하고 대비책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오리는 군사를 모아 결전하려는 도원수 권율의 계획에 대하여 兩湖에서 14천 석의 곡식을 내야 할 형세이므로 쉽지 않을 것이기에 원수를 만나 의논하겠다고 하였다. 특히 일본의 財力이 부유하고 웅대하다는 선조의 우려에, 오리는 저들은 한 3백의 精兵이 있더라도 죄다 抄錄하여 날마다 田賦에 따라서 군사를 내므로, 어느 로는 어느 군사를 공급할 수 있다는 것을 마련한 후에 움직인다고 대답하여 일본군의 군량 보급이 충실함을 언급하였다. 오리는 淸野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하였는데, 이렇게 하면 방방곡곡에 저축한 것이 깨끗이 없어져 적의 군량 문제를 어렵게 되므로, 적이 오는 길을 끊거나 늦출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왜적을 막기 위해서는 山城의 지세나 시설에 대한 점검이 필요했다. 오리는 星州山城에 대하여 수축했어도 성 모양이 좋지 않고 골짜기의 평평하지 않은 곳에 있으므로 將士들이 다들 그곳에 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평가하였다. 그밖에 善山金烏山城城子가 매우 좋으나 물이 적어 우물을 파야하는 점, 안에 민가가 빽빽하지만 온 힘을 다하여 방비할 곳은 대개 적은 점 등을 지적하였다. 公州山城은 오리가 직접 올라오며 살펴본 결과 물가의 산성으로 안이 대접과 같아서 형세가 매우 낮고 좁다고 보았다. 다만 중간에 물이 막혀 있고 가운데 언덕이 있으므로 조치하여 민가를 만들면 매우 좋은 까닭에 감사가 衙屬을 데리고 들어가 지킬 생각이라 하였다.

 

2. 문무겸전 리더십

 

오리는 書狀을 올려 이르기를, 는 어느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는 것이고, 文敎武備의 근본이 되는 것인데, 병란이 일어난 이래로 문교가 없어져 經典詞章 모두 여염에서 들어보기 어렵고 세상 풍습이 날로 투박해지고 있으니 매우 한심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선비를 모아 詩才하여 그들의 뜻을 진작하려 했으나 영남은 왜적이 변방에 웅거하고 있어서 거행하지 못하였고, 이번 羅州를 순찰하는 길에 試才하여 入格한 사람을 포상하였으며, 全州와 충청도 중앙 지역의 고을을 순찰할 때도 시재하려고 계획 중이라 보고하였다.

오리는 서검재(書劍齋, 향교와 서원에서 유생들의 문무연마를 제도화 함)를 제정하여 무예, 징집문제 측면의 제도를 개혁한다. 서애는 방패를 베고 누워 눈물과 한숨으로 밤을 지새우고, 병제(兵制)가 오랬동안 피폐해진 것을 한탄하여 바로 잡아 세울 것을 생각하며, 또 제대로 상벌을 시행하므로한 달 사이에 성과가 있게 되었다고 밝혔다. 논공행상을 분명히 하는 것이 성공의 요점이다.

 

3. 무관 포폄의 시사점

 

첫째, 포폄사상 관련 수령과 무관의 장오범죄에 대한 오리의 대응은 인조가 국가의 법도와 기강을 세우는 일을 이원익에게 물은데 대해, 이원익은 국가가 사리에 맞게 조치를 취하고 상벌이 온당하게 시행되면 죄를 받는 자는 두려워하고, 상을 받는 자는 권장될 것이다.”라고 공명정대한 상벌을 적용해야 함을 상주한다. “감사를 가려 보내어 출척黜陟을 엄하고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나라에 元氣가 있으면 사람들이 절로 두려워하고 삼가는 것이다.”(인조521624 갑자). “전하께서는 한결같이 공평한 마음으로 인재를 등용하여 조금도 사심이 따르는 일이 없으면 인재는 저절로 나옵니다.”라며 정도를 지킬 것을 아뢰었다(이종수, 2016).

둘째, 그의 학문은 국가의 정치 현실에서 보편타당한 정책을 궁리하여 실현하고,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윤리적 규범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즉 그는 전형적인 실무 관료 형 학자라고 할 수 있고 그의 학문도 무실(務實)을 중시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원칙과 상식을 중시하였고, 도덕적 실천에 노력하여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다. 그는 비록 성리학의 학문 연구에 몰두하지는 못하였지만, 자신의 심성과 인격 수양 그리고 체력 단련에 철저하였다.

셋째, 이원익은 매우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합리적인 정신은 풍수설(風水說)을 철저히 배격하고 동족 공동묘지를 조성하도록 강조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그의 관직 생활에도 크게 작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원래 명민한 자질을 가지고 있었고 판단력이 정확하였지만 지식이나 정보를 넓히기 위한 노력도 중시하였다. 그는 천하의 사정에 정통하면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을 처리할 때는 그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는 또 직무를 잘 수행하기 위해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하기를 강조하였다.

넷째, 이원익의 공직 윤리에서 으뜸을 차지하는 것은 성실과 근면이었으니 그는 고관이 된 후에도 매일 출근하는 일에 있어서도 남보다 뒤처지지 않았다. 그래서 선조로부터 이원익의 부지런함은 누구도 미칠 수 없다는 칭찬을 받았다.

다섯째, 인사행정적 시사점(이종수, 2016 : 128-129)이다. 무관 포폄과 관련해서 보면 오리의 법치사상은 청렴관료와 부패 예방을 위한 단서가 될 것이다(이종수, 2015.11). 조선 개국 초기 효령의 하명을 받아 시행한 함흥향헌 제15조 관사불근(官事不勤) 공직자가 공무를 소홀히 하는 행위 제19조 여사농권(旅師弄權) 군지휘관이 직권을 남용하는 행위 제22조 간이작폐(奸吏作弊) 간교한 공직자가 민폐를 끼치는 행위 제23조 회뇌간청(賄賂干請) 공직자에게 뇌물을 주어 부당한 일을 꾀하는 행위 제24조 이강능약(以强凌弱)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짓밟는 행위 제30조 빙공영사(憑公營私) 공무를 핑계로 사욕을 챙기는 행위 등의 조목은 현대적인 국방정책 부패 방지 철학으로 활용가능하다.

여섯째, 오리의 무관포폄의 현대적 시사점은 먼저 한국행정학에 있어서 인사제도적 골간은 주로 일제시대 잔재와 1950년대를 전후하여 도입된 미국식 인사행정제도에 경도되어져 왔으며, 그들의 제도를 금과옥조처럼 받아들여 정통이라고 여겨져 왔으나 우리 문제는 우리들 자신에게서 찾아 치유해야 맞다(전광섭, 2016). 그런데 외국제도를 우리 문화적 토양에 맞추려니 잘 작동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 문제의 해법은 우리의 전통과 행태에 적합하게 접근해야 답이 얻어진다. 조선인사제도의 근거인 경국대전포폄제도를 바탕으로 한 實績 중심의 포폄제도의 내용과 실행은, 특히 이원익의 공명정대한 포폄제도의 실행은 현대인사제도의 이론적 출발점을 16세기로 끌어올렸다는 점과 영,미 중심의 인사제도적 틀을 자기화시킬 수 있는 이론적, 실증적 근거를 찾아 제시했다는 점에서 독창성과 전통성이 인정되며, 그런 측면에서 學術的 意義가 크다(이종수, 2016).

 

2절 오리 스토리텔링

 

1. 부동심 스토리텔링 힐링

 

첫째, 완평(完平)의 부동심(不動心) 스토리텔링 활용측면이다. 그는 오랜 수양을 통해 마음을 잘 닦아 거울처럼 모자라거나 이지러진 부분이 없도록 다듬었다. “부동심의 경계에 대한 인()의 실현에 대한 희구라는 표현처럼 그는 만년에 허목(許穆)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물건을 비추는 거울과 같다네. 기미를 잘 살펴 취사를 잘 결정할 수 있다면 마음이 밝은 것이네. 용맹은 밝은 데서 나오니, 밝으면 의혹이 없고, 의혹이 없으면 흔들리지 않는다네.” 허목은 이것이 공의 평생의 힘을 얻은 방책이다라고 평했다. 이런 마음의 완전경지가 부동심(不動心)이다(이종수, 2014.6,7,9).

오리인성, 청렴체험교육체험자 설문 결과(이종수, 2016) 국민청렴정신교육 효과에 기여함이 확인됐다. 동 프로그램의 확대와 확산을 위하여 보다 구체적인 부패감시의 내면화, 객관화와 통찰, 모방과 공감기제의 활용 방안 등의 프로그램화가 요청된다(이종수, 2015.12abc ; 2016, 2017). 먼저 본 프로그램 참여자들은 정신적 힐링에 도움이 되었음이 확인되었다. 둘째, 프로그램 참여는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으며, 셋째, 프로그램을 지인에게 권유하겠다는 응답과 프로그램에 재참여 의사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끝으로, 동 프로그램은 국민청렴정신 교육에 효과가 있다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둘째, '비바람도 가리지 못하는 집에 떨어진 갓을 쓰고 쓸쓸히 지내니 아무도 그가 재상인 줄 알지 못했다(인조실록 12129). 필부로 고향에 돌아오니 노년에 가진 것은 비 새는 초가집 한 채뿐이었다.

手製 돗자리 '영상수직석(領相手織席)' 수양법, 왕골 가꾸기이야기이다. '오리(梧里) 정승'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만날 사람도 거의 없었고, 할 일도 없었다. 결국 시작한 것이 혼자 쪼그리고 앉아서 돗자리를 짜는 일이었다. 이원익은 쉬지 않고 돗자리만 짰다(不息而作之). 식사시간 정도만 빼고는 종일 돗자리에 매달렸다. 그런데도 솜씨는 늘지 않았다. 보통 사람이 34일이면 완성하는 돗자리를 56일이나 걸려야 끝낼 수 있었다. 그나마 엉성했다. 투박하고 거칠었다. 그래도 쓰고 남아서 친척이나 친지에게 나눠줄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돗자리가 필요한 사람들이 어쩌다가 얻으러 오기도 했다. 그럴 때면 요구하는 대로 만들어줬다(有求必應). 오리 정승은 돗자리에 '올인'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털어놨다. "글과 친하려니 노후(老後)가 가까웠고, 글씨나 시를 즐기자니 혼자서 하기는 겸연쩍었다. 어울려서 즐길 만한 사람도 '별로'였다. 장기나 바둑은 악습(惡習)이라 원래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돗자리를 짜면서 소일했더니 100가지 잡념이 가라앉았다." 왕골도 직접 가꿨다.

셋째, 오리와 같은 素食은 현재의 삶에서 욕망과 집착에 얽매이지 않고 육근을 청정하게 잘 다스려 진정한 행복, 궁극의 마음을 찾기 위한 약이며 방편이다. 서애 유성룡은 선조에게 오리의 소식으로 인한 노쇠육신을 육보로 건강을 유지할 수 있도록 상주한다(조선왕조실록선조 13133, 1600, 경자).

넷째, 문무겸비의 측면으로 정좌수양 프로그램과 무예 등을 체험하게 한다. 정좌 프로그램 및 검술이나 궁도, 기마술, 씨름 등의 체험프로그램 개발하여 청소년과 참여자들에게 체험할 수 있게 한다. 오리는 평양과 강화도에 서검재(書劍齋)’를 개설하여 유생들이 문무를 익힐 수 있게 제도화했다. 본인이 직접 갑옷을 입고 검술과 무예를 익히기도 했다(김영호, 2015, p. 15).

다섯째, ‘오리인성체험관을 신설하여 보다 체계적으로, , 장기적인 발전전략 개발과 실천이 요청된다(이종수, 2015.11, p.74).

 

2. 프로그램 신설과 활용

 

첫째, 오리명상과 섭생 프로그램 참여 등과 가마니 짜기, 돗자리 짜기 등 등과 묘지나 서원 인근 초지(돗자리 용 왕골 조성) 조성하여 체험코스화 한다. 오동나무 숲 조성(오리 숲)을 조성하여 체험케 한다.

둘째, 눈 오는 날 달빛아래서 오리가 산책을 하던 설월리 스토리텔링과 영당마을은 오리 영정이 모셔진 영우가 있는 마을을 스토리텔링한다.

셋째, 프로그램에 오리청렴밥상(, , , )’ 프로그램 개설이 필요하다. 예시하면 오리탕(채소, 감자, 배추 등), 오리적(맥적 등), 오리술(동굴 와인 참조) 등이다. 경주시는 경주역에 놋그릇 육개장을 특성화 했다. 가능하면 오리시대 식기를 복원하여 활용하며, ‘청백리밥상체험으로 음식을 통한 탐욕 절제를 체험하게 유도한다.

물질적 측면의 음식과 오리 거리 조성, 오리뮤지컬, 가학산 동굴문화박람회 등을 예시할 수 있다(활동, 명상, 걷기 등). ‘오리대감 청백리 밥상등 건강식단 개발을 통한 프로그램 개발 등도 포함시킬 필요가 있다. 이원익 종가의 음식에서 명절과 제사음식 등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하여 표준화 한 청렴 힐링 음식을 개발한다. 쇄미록(鎖尾錄)은 임진왜란 시 피난길에 나선 양반이 쓴 일기다. 임란 당시 전쟁음식들은 쌀, 조기, 민어, , , , 소고기, 소금, 정조 등과 버섯, 나물, 산채, , , , 수제비, , 탕 등이다. 서민들은 곡물죽과 야채죽을 주로 먹었고, 노비들은 송피(소나무 속껍질)를 먹었다. 기타 송저(송저 : 솔잎 썰어 더운 물에 붓고 담은 김치)였다. 유몽인(1559-1623) 어우야담에서는 서울의 絲麵(실국수), 개성 교면(메밀국수), 전주 백산자(白散子), 안동 다식, 성주의 백자병, 용인 오이지 등이 전해진다. 경주에는 이사금 밥상, 통영에는 이순신밥상, 장성에는 청백리밥상이 있다.

넷째, 정서적 측면의 서예와 거문고 연주 체험, 음악회 개최 등을 예시할 수 있다.

다섯째, 학문사회적 활용측면에서 보면 본 연구는 조선조 성리학사상을 현대 행정의 문제에 접목함으로써 한국 행정 철학의 뿌리를 찾고, 현시대에 학문적 배경에서 해결되지 못하는 관료행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 측면에서 철학적·학문적·실체적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여섯째, 문무겸비의 측면으로 정좌수양 프로그램과 무예 등을 체험하게 한다. 정좌 프로그램 및 검술이나 궁도, 기마술, 씨름 등의 체험프로그램 개발하여 청소년과 참여자들에게 체험할 수 있게 한다.

끝으로, ‘오리청렴, 인성프로그램을 정부로부터 인증을 획득하여 중앙, 지방 간부공무원들에게 체험을 의무화하는 것도 새로운 마케팅이 된다. 국민권익위원회 청렴 연수원 벤치마킹 사항이다. 2014년 현재 청렴연수원(www.acrc.go.kr)은 과학적인 청렴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부패방지, 예방을 지향한다. 주요 내용은 청소년 민간대상 청렴교육 확대, 공직사회 청렴문화 정착, 사회 각급 기관 청렴 문화 확산에 주력한다. 주요 프로그램 사례로는 고위직 과정, 중간관리자 과정, 신규자 과정, 청렴강사 양성 과정, 청렴강사 인증과정, 반부패 감시부서장 과정, 반부패 정책전문가 과정, 특별교육과정 등을 운영한다. 특히 정신적 측면의 청렴스토리텔링을 활용한다(이종수, 2014.3 : 108). 오리의 청렴스토리를 중심으로 한 정신적 힐링(교육 중심)프로그램을 개발하여 활용한다. 물욕통제 측면으로 예의염치(禮義廉恥) 체험을 통한 물욕 통제의 구조화다. 탐욕과 물욕의 제도적 정신적 통제구조로서 힐링과 수행제도 프로그램화 측면이다.

 

. 나가는 글

 

본 고는 조선 중기 兩難期 오리의 국방정책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현대적 국방정책 시사점과 현대적 활용과제를 찾아보았다. 주요 내용은 오리의 부동심, 국방정책의 주요 내용과 시행과정을 그의 국방정책의 군사적 비군사적 측면과 사례 등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정책 대안을 제안하였다. 본 연구는 조선시대 역사적인 인물의 정책실행과 개인적 특징을 바탕으로 전란이란 효과적인 군사적 대응이 요구되는 시기를 극복한 실제적인 사례를 활용하여 향후 국방정책의 전략적 방향과 근원적인 문제해결에 필요한 이슈를 강구할 수 있는 데 연구의의가 있다.

그의 전락극복의 핵심적 사상은 부동심과 공변(公遍)정신이란 공사의 구별과 정사의 분별을 통한 실무분석과 평가, 포폄의 공정성 등이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실천적 행정()이란 현장에서 겪은 경험에서 체득된 백성중심의 행정 서비스를 말하는 데 오리의 경우 도학적 부동심을 바탕으로 한 철저한 백성중심, 안민행정이었다는 점에서 현대적 행정의 귀감이 된다. 오리 이원익의 국방정책 사례 분석을 통하여 양난기 국방정책 효과와 주요 시사점을 도출하고 현대적 활용측면을 강구하였다.

이원익은 국가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는 전시 체제의 조정에서 관찰사와 정승을 지내면서 전투지휘, 후방지원, 민생대책, 외교활동 등의 다양한 公務를 몸소 처리하면서 전란 극복에 다른 누구보다도 지대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현대 국방정책 또한 유미무환, 문무겸전 리더십 및 인사평가에 대한 공정성을 중심으로 난국을 극복한 오리의 지혜를 토대로 삼아 오늘날 부패로 점철된 국방과 방위산업 등에 대한 壯士斷腕의 반성을 촉구한다.

2016년 박근혜 정권에 대한 탄핵 이후 전전 정권차원의 권력농단 등과 적폐, 불공정 행위 등의 개선 관련 및 현 정부의 편파 인사 등에 대하여 아마도 오리였다면 공편(公遍)을 중심으로 국가정책을 결정, 집행하여 사사로운 개입을 차단하고, 修己不動心에 기반하여 처결하여 백성으로부터 신뢰를 받았을 것으로 예측된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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