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은 2018년 12월 강원대, '강원문화연구' 게재본임. 무단인용을 금지함.
수원향약과 왕갈비문화 스토리텔링
- 수원 왕(王)갈비문화 활용을 중심으로 -
Suwon's Hangyak & Wang Galbi Culture Storytelling
이종수(중앙대)
< 요약 > 본 고는 조선후기 화성유수부 수원향약 집행결과를 토대로 수원지역 재정확충방안 사례와 그 결과로서의 수원왕갈비문화와 재정관계 특성 및 그 스토리텔링 마케팅 방안을 제안함을 목적으로 한다. 주요 내용은 18세기 수원 왕갈비(13㎝)의 역사적 기원, 원류 분석( 『禮記』, 『儀禮』, 『居家必用』, 『거가필용사류전집』, 『飮膳正要』, 『山林經濟 1,2』)과 수원정착 배경 및 그 사회적, 주민자치적 활용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기원 분석측면은 갈비(曷非, Galbi)와 고구려의 맥적(貊炙)과의 동질성과 고구려 맥적이 불고기와 갈비로 발전함을 논증하고자 한다. 3세기 진(晋)나라 『釋名』,『搜神記』, 『高麗史』,『海東竹枝』의 설하멱 등의 기록을 참조한다. 연구의 범위는 시간적 측면에서 고려 후기부터 정조대와 현대를, 공간적 측면에서는 수도권(개성, 한양, 수원)의 수원 왕갈비문화를 중심으로 접근하며, 방법적 측면은 선행연구와 현장 조사 및 주요 일간지, 전문가 견해를 참조하여 분석한다. 연구결과 수원 왕갈비문화의 현대적 주민자치 재정확보 측면에 한정하여 그 활용방안을 3가지로 구분하여 제안하였다.
주제어 : 수원향약, 신도시정책, 맥적(貊炙)과 갈비, 수원 왕갈비 스토리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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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글
본 고는 21세기 이야기 경제(Story economy)시대를 맞이하여 조선후기 정조(1752∼1800)시대화성유수부 수원향약 집행결과를 토대로 수원지역 재정확충방안 사례와 그 결과로서의 수원왕갈비문화 스토리텔링 마케팅 방안을 제안함을 목적으로 하며, 왕갈비의 수원정착 배경 및 수원 화성 축성에 얽힌 지방재정 이야기와 갈비 스토리텔링 마케팅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본 연구의 필요성과 의의로는 지역전통음식문화와 주민자치를 접맥시켜 지역 문화의 애착과 자긍을 심을 높이고(이종수, 2015), 주민자치 참여도를 제고시키는 데 일 부분 기여할 수 있는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다는 데 그 필요성과 의의가 있다.
연구의 주요 내용은 화성축성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한 상인, 관료, 소장수, 노동자, 민초들의 의식주와 특히 음식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고대의 맥적과 고려의 설야멱, 조선시대 너비아니가 수원 왕갈비로 정착하게 된 배경과 특성 등을 분석한다. 민본사상 실천 제왕으로서의 정조의 신도시개발 정책과 갈비문화를 접맥시키는 한편 백성과 노동자들의 갈비탕, 곰탕, 국밥 등 탕(湯)국과 갈비(불고기 포함) 문화 확산 이유를 조명한다(이종수, 2015, 2016ab). 정조의 화성(華城)축성 과정에서의 음식사례 등과 현대 수원시의 갈비문화 시초(‘華春屋’), 특성(이재규, 2003ab ; 이종수, 2015.12) 등을 비교 분석하고, 정조의 화성 축성 계기, 과정을 분석한다. 정조의 화성축성과 재정 관계, 인력동원, 의식주, 음식관계, 품삯 관계 및 수원향약 등의 특성을 조명(『화성성역의궤』; 최홍규, 1992, 1993)하고, 현대 주민자치 재정 확보의 시사점을 찾아보고자 한다.
연구의 범위는 시간적 측면에서 고려 후기부터 현대를, 공간적 측면에서는 수도권(개성, 한양, 수원)의 수원왕갈비문화를 중심으로 접근(이종수, 2016ab)하며, 방법적 측면은 선행연구와 현장 조사 및 주요 일간지, 전문가 견해를 참조하여 분석한다. 갈비 스토리텔링 마케팅은 필자의 선행연구(2012, 2013, 2014, 2015, 2016) 등을 참조하고, 갈비문화 스토리텔링 체험코스와 프로그램 신설, 수원갈비문화원, 갈비박물관 신설 등을 중심으로 정책대안을 제안한다.
Ⅱ. 18세기 수원향약과 재정관계의 이론적 접근
제1절 수원향약과 신도시 재정
1. 화성유수부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도읍이었던 개성에 유후사(留後司)제도를 시행하다가 1438년에 유수부로 명칭을 변경하고, 1443년 유수의 품질(品秩)을 종2품으로 결정했다. 1627년 정묘호란으로 정국의 긴장감이 고조되자 강화에 유수부를 설치하였다. 1793년에는 수원부를 화성유수부로 승격시켜 서울 주위에 4개의 유수부(수원, 개성, 강화, 광주)가 호위하는 체제가 완성되기에 이른다.
그런데 정조가 수원에 유수부를 설치한 이유는 현륭원을 수원으로 옮긴 후 사도세자의 음덕으로 1790년 원자(元子)가 태어났음을 강조한 데서 비롯되었다. 왕실의 기반을 든든히 한 사도세자의 무덤이 위치한 수원이 새로운 풍패(豊沛)의 땅이 된 것이다.
1793년에는 수원의 이름 자체를 화성으로 개명하면서 유수영을 설치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새로운 도시 건설인 읍성으로서의 화성 성역이 진행되었다. 화성 성역은 '현륭원과 화성행궁의 보호'라는 명분을 걸고 정조의 각별한 관심 아래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정조는 초대유수 채제공과 훈련대장 조심태가 이 중요한 역사(役事)를 주관하도록 했다. 더욱이 정조는 직접 팔달산에 올라 축성의 대략을 지시하기도 했는데, 자신이 내려와 살 곳을 직접 마련한다는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유수부는 지방행정조직이 아닌 경관직(京官職)으로 운영되었으며, 동시에 군사조직의 성격을 갖고 있다. 수원에 장용영(1802년 이후 총리영)을 설치했듯이 개성에 관리영, 강화에 진무영, 광주에 수어청을 설치하고 각 유수들이 군영의 대장을 겸임하여 휘하의 군대를 통솔케 했던 것이다.
따라서 수원이 유수부로 승격되고 군영이 설치되었으므로 화성이 건설되는 것은 타 유수부의 전례에 비춰 필연적인 일이었다. 이후 화성유수부는 한양 남쪽을 담당하는 주요 도시로 성장하며 근대에 들어서는 경기도의 수부도시가 된다.
화성 건설 같은 대규모 토목건축을 계획하는 통치자라면, 당연히 국민에게서 세금을 더 많이 거두는 방안을 고민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국민적 저항을 받지 않고 세금을 더 거둘 수 있을까 하고 고민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조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세금 거둘 생각부터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사업으로 인해 서민들이 겪게 될 부담을 먼저 걱정했다. 단 한 번도 서민의 삶을 경험해보지 못했는데도 그는 사업구상 단계에서부터 서민들의 가계를 염려했다. 정조의 그런 마음씨는 정조 20년 10월 22일 자(1796.11.21) 『정조실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변사 고위 관계자인 이시수에 대한 업무지시에서 그는 "재물은 백성과 나라의 근본"이라면서 "세금이 적어야만 민생이 안정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재물은 국가뿐 아니라 백성에게도 소중한 것이므로 세금을 함부로 거두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백성의 재산을 '돌'처럼 생각하지 말고 '금'처럼 생각하라는 메시지였다.
정조는 말만 그렇게 하는 군주가 아니었다. 그는 화성 건설과정에서 자신이 그런 군주라는 점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위의 『정조실록』에 나온다. "(나는) 화성 공사를 3년 만에 종결지으면서도 백성들에게 번거로움을 끼치지 않았고 국고를 건드리지도 않았다."
정조가 공사비용을 조달한 방식은 두 가지였다. 첫째, 그는 공사계획을 발표하기 오래 전부터 왕궁 금고(내탕고)에 차근차근 자금을 축적했다. 요즘 말로 하면, 봉급과 판공비를 아껴서 화성 건설비용의 상당부분을 준비했던 것이다. 둘째, 그는 자신의 경호부대(금위군)를 축소시켰다. 공사 개시 10년 전부터 금위군을 축소 운영하고 거기서 생기는 여윳돈을 착실히 모아두었던 것이다. 금위군을 축소할 당시만 해도 주변 사람들은 정조가 무슨 의도를 갖고 있는지 몰랐을 것이다. 그는 '서민들의 돈'을 거두지 않고 '자신의 안전'을 거두어서 화성 건설비용을 조달했던 것이다(오마이뉴스, 2011.5.3.).
2. 화성축조와 우시장
화성 건설에 대해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던 정조는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자 저술가인 정약용에게 도시 설계를 맡겼다. 일찍 실학을 접한 정약용은 전통적인 방법을 기초로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여러 도시에 관한 책을 참고하여 화성을 설계한다. 1년 남짓 연구한 끝에 정약용은 도시의 기본 틀과 구체적인 건축 방법까지 꼼꼼히 담은 「성설」이란 제하의 보고서를 완성해 정조에게 바쳤다.
설계는 정약용이 했지만 화성의 공사 책임자는 영의정이었던 ‘채제공’이었다. 채제공은 정약용을 비롯하여 박지원, 홍대용, 박제가, 화성 건설 감독관 조심태 등 젊고 유능한 실학자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화성신도시는 정조의 성리학적 민본행정에 따른 백성중심사상이 실학으로 구현되고, 신도시개발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시행에 따라 시전과 상업구조의 변화를 유도하여 백성의 삶의 질을 제고하고, 수원의 음식문화를 정립하는 계기를 열었다.
첫째, 화성과 둔전관련 경기도 수원은 조선 22대 임금 정조대왕이 효심과 개혁을 위해 세운 신도시이자 최초의 계획도시이다. 정조대왕은 부친 장헌세자(사도세자)의 묘인 헌륭원을 수원 화산으로 옮기면서 화성(華城)을 축조, 수원의 자립 기반을 다지기 위해 둔전을 경영했다. 백성들에게 논밭을 나누어주고 농사를 잘 짓도록 종자와 소를 나누어 줬다. 1년 도지(사용료를 치르고 빌려서 경작하는 논밭)로 소 한 마리당 쌀 20말을 내게 하는 조건이면서 3년 안에 송아지 한 마리로 되갚는다는 약조 하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점차 늘어난 소를 팔고 또 송아지를 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우시장이 형성, 수원 우시장은 전국 3대 우시장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수원에서 갈비가 발달할 수 있었던 데에는 우시장의 영향이 컸다. 소 공급이 풍부해 갈비를 구하기가 쉬웠기 때문이다. 또한 수원은 예부터 곡창지대가 근접해있을 뿐 아니라 한양으로 들어가는 농수산물의 집결지여서 먹을거리 문화가 풍부했다.
둘째, 갈비문화의 토대로서의 우시장 측면이다. 정조시대 화성건립을 계기로 소시장, 불고기 문화 활성화 한다. 정조의 둔전, 국영농장 대유둔 정책으로 농민과 노동자 유입된다. 수원유수부에서 잔치에 소고기 식용 시책으로 소고기소비 활성화, 갈비문화로 정착된다(정해득, 2012 ; 최홍규, 1993).
3.『화성성역의궤』
수원 화성은 조선 후기에 세워진 계획도시로 개혁적인 통치자 정조와 실학자들이 지은 성곽 도시로, 조선 후기 토목 건축의 백미이다. 화성 건축에 관한 모든 과정을 기록한 책도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다. 설계부터 동원된 사람과 장비, 공사 과정에서 일어난 사소한 일까지 『화성성역의궤』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화성 건설에 관한 놀라운 점은 도시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모든 사실을 완벽하게 기록해 놓았다는 사실이다. 준비 과정에서부터 완공에 이르기까지 여러 권의 책과 보고서가 작성되었는데, 도시 건설에 관해 이렇게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는 곳은 화성이 유일하다.
화성 건설에 관한 첫 번째 기록은 정약용이 도시 계획을 기록한 〈성설〉이다. 그 밖에도 화성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화성일기」와 『화성성역의궤』 등이 있다. 성곽과 도시를 건설하는 전 과정을 담아 낸 책이 바로 『화성성역의궤』다. 『화성성역의궤』에는 화성 건설 계획을 비롯하여 공사 기간, 공사에 동원된 인원, 사용된 자재, 건설 방법 등이 모두 기록되어 있다.『화성성역의궤』를 보면 방대한 성곽 도시를 단 2년 9개월 만에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사 계획을 치밀하게 세우고 새로운 장비와 기술을 도입했기 때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높은 곳으로 무거운 돌을 끌어 올리기 위해 도르래를 이용한 거중기를 사용했고, 짐을 실어 나르는 수레인 유형거, 물건을 들어 올리는 기구인 녹로 등의 건축 기구를 사용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이 모든 내용이 글과 그림으로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화성성역의궤』를 보면 건축 자재와 기법에도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처음으로 벽돌을 도입하여 건축을 한다.
『화성성역의궤』는 화성이 완공된 1796년 9월 의궤청(儀軌廳)이 설치되어 2년 동안의 각종 기록과 자료들을 정리해 완성된 것이다. 모두 10권 8책으로 되어 있는 『화성성역의궤』에는 최고 수준에 도달한 정조 시대의 과학기술과 문화 역량이 총집결되어 있다.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화성 성곽은 1975년 정부가 복원한 것인데, 당시 불과 3년이라는 짧은 시간으로 완벽에 가깝게 공사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화성성역의궤』에 기록되어 있는 자세한 설명과 사진처럼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그림 덕분이었다. 이외에도 『화성성역의궤』에는 도시와 성곽(城郭) 및 행궁(行宮) 축조와 공사에 관련된 공식 문서와 참여 인원, 소요 비용 및 물품, 건축 설계 및 이용 도구, 예산 및 결산에 관한보고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에 이른 기술자의 명단까지 직종별로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에 천민(賤民)인 석공이나 목수, 미장이나 기와장이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또한 임금을 하루 반나절까지 세밀하게 계산하여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4. 수원향약과 현대적 주민자치
수원향약의 특성 5가지(최홍규, 1992,1993) 등과 華城축조와 외성축성론 등 우하영의 시무책을 참조한다. “수원유생 우하영경륜”의 제언과 정조의 대응 등을 참조하는 한편『國譯 華城城役儀軌』(수원시, 1977 ; 최홍규, 1993 : 5)를 참조하였다.
정조대 『향약록』, 정조 4년 『표창록』등의 사료와 예컨대 정조시대는 수령이 군현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케 하여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권을 강화하였으며(최홍규, 1992), 황윤석(노혜경, 2006)의 당시 목천현 향약집행 사례를 참조하였다.
화성 건설은 1794년 1월에 시작되어 1796년 9월 초에 끝났다. 예상보다 훨씬 빠른 2년 9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정약용이 설계한 첨단 기계를 사용한 것은 물론, 일꾼들에게 정확히 품삯을 주어 열심히 일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화성이 완성되자 정조는 그해 10월 16일, 축하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지금도 수원에서는 매년 10월이면 정조 임금의 행차 등 다양한 행사를 열고 있다.
본고에서는 “화성유수부(수원부)의 향약적 고을주민자치란 수원향약에 기반하여 특정지역 고을의 문제를 자기 주관 하에 처리했던 자율적 자치행위”라고 보고, “현대적 주민자치란 자기지역 제반 문제를 주민자치회가 지역주민 문제를 스스로 처리하고 그 결과에 대하여 책임을 지는 동네 주민자치행위”로 정의한다.
제2절 선행연구와 분석의 틀
1. 선행연구 분석
첫째, 조선시대 향약은 선조 5(1572), 源洞鄕約 설립, 인조 16(1638)『향약록』, 숙종(1675), 영조(1745), 정조(1780)『표창록』등을 들 수 있다. 향약의 주민자치, 참여적 측면은 이종수(2015.6ab), 이종수, 이병렬(2015), 이종수(2015.8)의 향약 기능, 향약과 주민자치의 연관성 등을 분석하였다. 조선전기 향헌(이병렬, 이종수, 2016), 음식문화 측면은 이종수(2016a. 봄호 ; 2016b. 봄호 ; 2015.11 ; 2015.12 ; 2015. 6 ; 2014.12 ; 2014.8) 등이 있다.
둘째, 고려 이전의 한국식생활연구 등과 사료로는 『高麗史』,『高麗史節要』, 『高麗圖經』, 『居家必用』, 『飮膳正要』(홀사혜, 1987),『齊民要術』등과 이성우(1984)의 연구에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의 홍만선(2007) 『山林經濟』는 居家必用의 조리법을 대다수 원용하고 있다. 齊民要術』(가사협 2006), 『거가필용사류선집』(작자미상 1987), 『飮膳正要』(홀사혜 1987)에서 증류식 아자길주를 최초로 기록하고 있으며, 徐兢의 『高麗圖經』이나 조선의 『山林經濟』(홍만선 2007) 등에도 탕과 소주 등이 전해진다.
셋째, 홀사혜는 대원제국의 『음선정요(飮膳正要)』를 저술하여 음식과 건강과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3세기 대원제국의 육식문화와 탕국문화가 고려에 토착화된다(이병렬, 이종수, 2014.12 : 283).
이상의 연구와 본 연구의 차별성은 원 제국 지배와 한양의 음식문화 변동과 적응내용을 13세기 이래 식용되어 온 토속음식 중 불고기와 갈비문화를 중심으로 분석하였다는 점이며, 또 다른 차별성은 수원 고을 음식문화 변동을 18세기 이래 수원 향약과 재정관계 측면을 둔전을 배경으로 한 수원 왕 갈비문화 연원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는 점이다.
2. 분석의 틀
본 연구는 정조의 화성축성과 재정 관계, 인력동원, 의식주, 음식관계, 품삵 관계 등의 특성을 조명하고자 한다. 분석의 주요 내용은 정조시대의 화성(華城)축성 과정에서의 음식사례 등과 현대 수원시의 갈비문화 시초(‘華春屋’), 특성(이재규, 2003ab ; 이종수, 2015.12) 등을 비교 분석한다. 주요 분석의 내용은 재정 관계, 인력동원, 의식주, 음식관계, 품삯 관계, 수원鄕約 등의 특성을 조명하고자 한다(『화성성역의궤』권2 ; 최홍규, 1992, 1993).
화성축성에 직, 간접적으로 참여한 상인, 관료, 소장수, 노동자, 민초들의 의식주와 특히 음식관계를 중심으로 분석하고, 맥적과 너비아니가 수원 왕갈비로 정착하게 된 배경과 특성 등을 분석한다(이재규, 2003ab).
Ⅲ. 수원 왕 갈비문화 분석
1. 갈비(불고기) 문화의 유래
첫째, 맥적을 즐겨먹은 貊族은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무대로 활동하던 종족으로, 부여와 고구려의 구성원이었다. 貊은 전설에 나오는 동물로 몸은 곰을 닮았고 코는 코끼리, 꼬리는 소, 발은 호랑이를 닮았다고 한다. 맥족은 우리의 선조였다.
불에다 구운 고기를 한자로 적(炙)이라 쓴다. 炙이란 글자를 보면 불(火) 위에 고기(肉)가 올려있는 모양이다. 한나라 때 사전인 『석명』에는 炙은 고기를 불에 구워 먹는 것이라 했다.
설야멱은 눈 오늘 날 밤에 숯불에다 고기를 구워먹었다는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말로 중국의 고사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설야멱을 풀이하면 '눈(雪)오는 밤(夜)에 찾는다(覓)'는 뜻으로 중국 송나라 역사서인 『송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설리적은 눈(雪)속(裏)에서 굽는다(炙)는 뜻이다.
『수신기』보다 전인 3세기 초반에 한나라에서 편찬된 사전 『석명(釋名)』에 맥적이 등장한다. 이 기록은 “맥적은 통으로 구워, 각자의 칼로 저며 먹는다. 오랑캐(호맥)의 방식에서 나왔다(貊炙, 全體炙之, 各自以刀割出於胡貊之爲也)”라는 간명한 설명을 하고 있다(한국일보, 2016.7.17.).
여기서 맥적의 윤곽이 드러난다. 몽골에서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에 이르기까지 오늘날 어느 유목 민족에게나, 그리고 그 후예들에게 남아 있는, 한데다가 불 피워 하는 네발짐승 통구이 요리 말이다. 이는 인간이 초식동물에서 잡식동물로 변할 무렵 아득히 먼 인간의 조상들이 시도했음직한 방법이다. 맥적은 유목민족의 로우테크 요리이다. 『수신기』나 『석명』의 음식은 불고기가 아닌 기본기술 고기구이다.
설야멱은 전통적인 고기구이인 맥적(貊炙)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산림경제』와 『閨閤叢書』에 등장한다. 불천위 제례 제수에서 현재도 전수되고 있다. 물에 담갔다가 굽는 방식인 설야멱은 예로부터 개성에 전해진 명물이라고 『옹희잡지』, 『해동죽지』에 기술됐다. 1609년 명나라 사신이 광해군을 책봉하러 왔을 때 대접한 음식이기도 하다. 다른 명칭이 관적(串炙)이다.
영조가 신하들에게 쇠고기를 먹자고 제안하자 “상(上=임금)께서는 금육을 이야기하면서 정작 본인은 드신다”는 말도 나왔다. 정조도 늦은 밤 규장각의 신하들과 난로회를 즐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져 온다(이종수, 2015).
고대 맥적의 전통과 연결된 불고기와 갈비문화는 출발은 한가지이나 고려 후기 원제국의 간섭과 조선시대 유교제의문화의 영향으로(불천위 제사 등) 제사 전통이 유지되면서 쇠고기(포적 등)음식이(갱 등), 조선 후기 영, 정조시대∼1950년대를 전후하여 불고기와 갈비의 외식화가 전개되기 시작한다.
첫째, 조선 인조 17년(1639년) 6월 24일자 '승정원일기'에 갈비(乫非)라는 말이 등장할 정도로 한국인은 오래전부터 갈비를 좋아했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소갈비 구이가 본격적 외식(外食) 문화로 자리 잡았다. 갈비가 외식으로 등장한 1920년대에 갈비는 대중 선술집에서 먹는 저렴한 음식이었다(박정배, 2014).
수원 갈비는 조선시대 너비아니에서 진화하였다. 정조시대 화성건립 시에 소시장이 활성화 된다. 정조의 둔전, 국영농장 대유둔 운영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이 대거 유입된다. 수원유수부에서 잔치에 소고기 식용, 갈비문화로 정착된 것이다.
우시장이 서는 날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소장수들로 인산인해를 이루던 1940년대, 수원문밖 장(지금의 영동시장)의 ‘화춘옥’에서 수원갈비가 탄생했다.
둘째, 본격적 외식으로서 갈비문화는 평양에서 시작됐다고 평가된다(정해득, 2014). 20세기 초 이미 평양에 ‘평양우’라는 일소가 아닌, 식용을 위한 육우가 있었다. 갈비는 불고기와 함께 평양사람들이 으뜸으로 치는 외식의 대명사였다. 1929년 『별건곤』에 평양에 갈비집이 생긴 것은 1920년대 중반 이후라고 했다. 평양갈비는 암소 갈비를 크게 썰어 설탕을 안쓰고, 굵직굵직한 석쇠에 굽는 것이 특징이었다.
셋째, 부산 갈비이다. 부산 갈비 문화를 이끄는 두 축 중 하나는 국제시장이다. 시장에는 1952년부터 '암소갈비 전문'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릴 정도였다. 국제시장 안쪽 신창동 3가 주변에는 쇠갈비를 전문으로 하는 식당이 네댓 모여있다. 1950년대 후반에 개업해 지금도 영업하고 있는 '평양 갈비'는 석쇠에 간장을 기본으로 한 소갈비를 구워 판다.
국제시장과 더불어 부산의 갈비 문화 양대산맥 지역은 해운대다. 1975년 당시 부산의 쇠고기 소비량은 서울(1인당 3.22㎏)보다 많은 3.38㎏으로 전국 최고였다(1976년 3월 13일자 경향신문). '해운대소문난암소갈비'는 1964년 지금 자리에서 창업했다. 간장을 기본으로 했지만 생갈비처럼 보일 정도로 살짝만 간한다. 다이아몬드 커팅 유행도 이 집이 주도했다. 갈비집을 창업하기 전 동래 요정에서 일본인들에게 칼집 내는 것을 배운 창업자의 기술이 깃든 조리법이다. 하루 정도 숙성시킨 갈비를 숯불에 전골 불고기 불판처럼 생긴 오목한 철판을 얹고 굽는 것도 이 집만의 특징이다.
넷째, 소금으로 간한 왕갈비이다. 수원 싸전 거리에 있던 해장국집 '화춘옥'은 1950년대 중반부터 갈비를 숯불에 구워 팔았다. 화춘옥에서 시작된 수원식 갈비는 길이 12㎝ 정도로 크게 썬 왕갈비를 소금으로 기본 간을 해 굽는다. 1924년 이용기가 쓴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에 '옛날 갈비 고명은 간장을 쓰지 않고 소금을 기본 양념으로' 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수원 갈비와 흡사하다. 화춘옥 주변에 갈비집이 한둘씩 생겨나면서 1960~70년대 싸전 거리의 갈비집들은 거리를 형성한다. 1970년대 말이 되자 수원에도 불어온 도심지 재개발 덕에 싸전에 있던 갈비집들은 수원지방법원 주변으로 이동하게 된다. 1980년대가 되자 자가용을 가진 '마이카'족이 등장한다. 수원 근처 용인자연농원(현 에버랜드), 민속촌 등에서 여가를 보낸 사람들은 수원을 찾아 수원 갈비를 먹고 돌아갔다. 수원 갈비의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2. 불고기(Bulgogi)
첫째, 불고기(영어: bulgogi)는 쇠고기를 양념에 재우고 야채를 넣고 자작하게 만든 한국의 전통 요리이다. 돼지고기로 만든 것은 따로 돼지불고기라고 한다. 구이에는 결합조직이 적고 지방이 조금씩 산재해 있는 고기가 맛이 있고 연하기 때문에 안심이나 등심 등의 부위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200여년 전의 풍속을 기록한 『東國歲時記』에 서울 지역에서 화로에 숯불을 피워 놓고 번철에다 조미한 쇠고기를 구우면서 화롯가에 둘러앉아 먹었다는 기록이 있다. 산림경제에는 너비아니에 대한 설명이 있는데, 우육을 썰어서 편을 만들고 이것을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것을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간장으로 조미해서 충분히 스며들면 숯불에 구워서 먹는 음식으로 기술되어 있다. 19세기에 철사가 도입되어 석쇠를 이용하여 숯불구이가 탄생하였다.
불고기라는 명칭은 과거 불에 구워먹는 고기라는 뜻으로 생겨났다가, 점차 양념한 고기를 익히는 의미로 바뀌었으며, 양념하지 않고 소금간만 하고 굽는 고기는 소금구이라고 칭하고 있다. 여기서 양념한 고기는 특별히 정해진 바가 없으며 어떠한 양념을 어떠한 고기 (주로 육류)에 발라 구워내는 음식을 모두 불고기로 표현하고 있다. 단, 고기에 통뼈가 붙어있거나 하는 경우는 갈비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둘째, 설상가리이다. 전통적 요리법으로 만든 불고기 중에는 고기를 재빨리 식힌 뒤에 다시 익혀내는 방법이 있는데 이 방법은 과거에 쓰여 왔던 고체연료로는 화력 조절이 힘들어서 겉을 태우지 않고 속까지 골고루 익힐 수 있는 방법이다. 고려시대의 설야적은 꼬치에 꿰어 양념해 석쇠에 구운 고기를 찬물에 담갔다가 꺼내서 다시 굽는 과정을 3번 한 뒤 양념을 발라 구워먹었다고 하고, '설상가리'라고 하여 구운 갈비를 눈 내리는 바깥에 던져서 급속히 식힌 후 먹는 것도 있었다. 고급 음식점에서 신선로와 함께 내놓는 궁중불고기에는 날 계란물을 담가서 먹는 방법이 있다.
셋째, 서울 불고기이다. 가운데는 볼록하며 구멍이 뚫려 있어 직화가 가능하고 가장자리는 오목하여 물을 담을 수 있는 불고기 전용 용기에 구워먹는다. 얇은 양은 용기가 불에 타기 쉬워 발화점을 낮추기 위해 가장자리에 물을 넣는데, 위에 올려진 고기로부터 흘러내린 육즙이 이 물에 합쳐져 또 하나의 별미로 인기를 얻어 영업점에서는 풍미를 더하기 위해 맹물대신 별도로 준비한 육수를 붓기도 한다. 이 용기의 기원은 정확하지 않으나 1960년대의 서울 시민의 생활을 묘사한 사진자료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으로 추정된다.
넷째, 불고기는 쇠고기를 얇게 썰어 양념장에 재웠다가 구워 먹는 음식으로 한국을 대표하는 전통음식 중의 하나이다. 불고기는 고구려의 맥적(貊炙)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맥적은 양념한 고기를 꼬치에 꿰어 불에 구워 먹는 음식이다. 이후 고려시대에 불교가 국교로 지정되면서 육식을 금하는 풍습에 따라 잠시 사라졌다가, 고려 말기에 몽골의 지배를 받으면서 설하멱(雪下覓)이라는 음식으로 다시 먹기 시작했다. 1800년대에 들어서 석쇠나 번철과 같은 조리기구가 쓰이면서 석쇠를 이용해 불에 간접적으로 굽는 너비아니로 발전하였고, 이것이 지금의 불고기로 이어져 오고 있다(이종수, 2016).
1939년의 『조선요리제법』에 나오는 ‘우육구이(너비아니)’ 만드는 법을 보면, “고기를 얇게 저며서 그릇에 담고 간장(진간장)과 파 이긴 것, 깨소금, 후추, 설탕을 넣고 잘 섞어서 굽는다”고 하였다. 삼국 시대와 고려 시대에는 불교를 숭상하여 육식을 금했으므로 채식을 주로 하였다가 고려 말 몽골족의 침입으로 다시 육식을 즐기게 되었다. 특히 몽골 사람이 많이 와 있던 개경에는 ‘설하멱’이라는 고기구이가 명물로 전해졌다.
『산림경제』(1715년경)의 「치선」편에도 ‘설하멱적’이 나오는데 “쇠고기를 저며 칼등으로 두들겨 연하게 한 뒤, 대나무 꼬챙이에 꿰어서 기름과 소금을 바른다. 충분히 스며들면 뭉근한 불에 구워 물에 담갔다가 곧 꺼내어 다시 굽는다. 이렇게 세 차례 하고 참기름을 발라 다시 구우면 아주 연하고 맛이 좋다”고 하였다. “고기를 구울 때는 대개 땔감으로 뽕나무와 닥나무 불을 꺼린다. 대꼬챙이에 꿰어 숯불 위에서 굽는데 먼저 기름, 소금, 장, 갖은 양념, 술, 초에 재웠다가 묽은 밀가루 풀을 살짝 발라 재빨리 구워 낸 뒤에 고기에 입힌 밀가루 껍질을 벗긴다”고 하였으니 지금의 조리법과는 많이 다르다. 이외에 고기를 구울 때 참깨 꽃가루를 고기 위에 뿌리면 기름이 흐르지 않는다는 비법도 적혀 있다.
『海東竹枝』(1925)는 “雪下覓(炙)은 開城府의 명물”이라고 기록했다. 설리적은 소의 갈비 혹은 염통을 기름, 마늘 등과 함께 굽는데 반쯤 익히면 물에 담갔다가 센 불에 다시 구워서 익혀 먹는다고 한다.「雪後野宴」은 개성의 설야멱(雪夜覓) 이야기가 담긴 김홍도의 그림이다. 조선시대에는 궁중음식인 너비아니(쇠고기에 잔칼질 함)로 진화하며, 조선시대 후기 불고기로 정착된다(김상보, 2014 ; 이재규, 2003a : 22-24). 소갈비나 염통을 기름과 훈채로 조미하여 굽다가 반쯤 익으면 찬물에 잠깐 담갔다가 센 숯불에 다시 굽는다. 눈 오는 겨울밤의 안주로 좋고 고기가 매우 연하여 맛이 좋다’고 하였다. 그 후 조선시대에 이르러 ‘설야멱적(雪夜覓炙)’은 궁중음식인 너비아니로 발전되었는데, ’너비아니’란 말은 소고기를 너붓너붓하게 썰어서 잔칼질을 많이 하여 육질을 부드럽게 하여 굽는 것을 일컫는 것으로 요즘의 불고기와는 달리 구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두툼하게 썰어 만들었다.
『필원잡기』를 보면 세종 때 직제학 벼슬을 지낸 김문은 정승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천하제일의 요리로 화제가 번졌는데, 그는 천하제일의 요리로 우심적(牛心炙), 즉 소고기 숯불구이라 꼽아고, 이에 모든 관리들이 맞는 말이라며 맞장구치며 즐거워했다고 나와 있다.
이상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신라 때부터 고려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설야멱 혹은 설리적이라는 숯불구이를 먹었던 것을 알 수 있다.
3. 너비아니
1800년대 말에 쓰여진『시의전서(是議全書)』에는 정육을 얇게 저며 양념한 것을 ’너비아니’라 하였고,『조선요리제법(朝鮮料理製法』(1939)에는 우육구이(너비아니) 만드는 법에 대하여 ’고기를 얇게 저며서 그릇에 담고 간장과 파 이긴 것, 깨소금, 후추, 설탕을 넣고 잘 섞어서 굽는다’고 하였다. 특히 1600년대에 쓰여진 조리서인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에는’설야멱(불고기)을 가지처럼 먹는다'란 말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꽤 보편화된 음식이었음을 알 수 있다.
1500년대 『미암일기(眉巖日記)』에 의하면 곡식, 육류, 어패류, 해조류, 과실류, 등의 음식문화가 보이고 있으며, 육식(류)과 관련해서는 조선시대 소고기 식용 등이 나타난다(김승우, 차경희, 2015 : 64-65). 원제국의 영향으로 소고기 식용이 일반화되고, 조선시대에도 소고기가 인기리에 상용한다. 1700년대 청국과 일본의 소고기 식용의 경우 중국은 양고기와 돼지고기 선호를, 일본은 약으로 만들어 환으로 복용했다. 조선은 우심적이 인기였으며, 소고기국(太羹)이 일상화했다. 조선시대 소고기 탐식가는 세종, 연산군, 광해군이었다.
한편 호궤(犒饋)란 군사위로용 소고기였다. 오리 이원익대감이 전라좌수영에서 충무공과 군사들에게 소를 잡아 치하한 음식이었으며, 그 일대는 지금도 ‘장군봉(將軍峯)’이라고 하여 회자되고 있다(이종수, 2015.11 : 67).
우리가 불고기를 먹기 시작한 건 조선시대부터다. 궁궐에는 ‘너비아니’라는 궁중음식이 있었다. 소고기를 얇고 넓게 저민 후 양념에 재워 석쇠에 구운 음식으로 궁중식 불고기라고도 말한다. 사극에서 하인이 화로에 석쇠를 얹고 고기를 굽는 장면을 종종 볼 수 있는데 그게 바로 너비아니다.
너비아니 관련 조선 시대 요리서의 기본인 『산림경제』(1715)의 요리편의 고기 요리는 60%가 원나라 초기의 가정백과사전인 『거가필용(居家必用)』에서 그대로 옮겨놓았다.
4. 너비아니와 야키니쿠
서민들이 소고기를 먹을 수 있었던 시대는 일제강점기였다. 당시 일본은 전쟁 중으로 전쟁에는 많은 물자를 필요로 하는데 그중 하나가 가죽이다. 일본은 부족한 가죽을 충당하기 위해 식민지였던 조선에 많은 소를 기르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조선은 소고기 공급이 늘어나게 된다.
풍요로운 소고기의 공급은 조선 내 야키니쿠(焼肉 やきにく) 가게를 늘리는 결과를 낳는다. 야키니쿠는 ‘구운(焼) 고기(肉)’라는 뜻으로 직역하면 불고기다. 지금도 야키니쿠라고 하면 일본식 불고기를 의미한다. 불고기라는 말도 이때 탄생한다. 우리 불고기는 양념에 재워 둔 고기를 조려가며 익히는 반면 일본의 야키니쿠는 양념을 발라 불에 굽는 직화구이에 가깝다. 비슷할지는 모르지만 엄밀히 말하면 둘은 다른 음식이다.
조선전기부터 중기까지의 고문헌들에는 설하맥적과 열구자탕이 자주 등장한다. 굽는 법 등과 관련 설하멱은 12회나 나온다. 가열과 냉수처리를 계속하여 먹었다. 열구자탕과 같다는 승기악탕은 일본의 ‘스끼야끼’가 조선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는 관점도 있다.
고려시대 후기의 전립투의 설야멱은 구우면서 동시에 냄비에 쇠고기와 야채 등을 육수장국을 부어 조리해 즉석에서 안주삼아 먹었으니 이것이 신선로와 열구자탕의 전신이다. 조선시대 궁중요리였던 소고기가 들어간 열구자탕(신선로)은 고서에도 수회 인용되고 있으며, 이것은 임금이나 왕비 등 및 고관들이 먹었으며, 일부 관원들이 조선통신사로 갔을 때 소개된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의 견해로는 승기악탕과 스끼야끼는 별개 문화였으나 문화교류를 통하여 상호 영향을 미친 음식이라고 본다. 1450년대 열구자탕과 전립투 문화의 기원은 韓食이 맞다. 그러나 1600년대 스끼야끼는 日食이 맞다(이종수, 2016 : 212-213).
조선의 열구자탕은 도미를 중심으로 한 국물문화로 발전되고, 일본의 스끼야끼는 에도시대 이후 소고기를 중심으로 한 국물문화로 발전된다. 일본인들은 소고기와 어육(魚肉), 채소 백 가지 물건을 섞어서 술과 장을 타서 매우 데린 것인데, 우리나라의 잡탕 등속과 비슷하다.
필자는 조선통신사 방문과 왜관의 일본상인 등을 통하여 현대판 한국적 열구자탕과 일본의 스끼야끼가 결합된 음식으로 풀이하고자 한다. 스끼야끼의 경우 문화교류에 따른 음식문화의 변동은 이입지역의 환경, 기후, 식재료 특성, 식습관 등에 따라 여과되어 토착화되는 특성을 띤다는 점에서 쇠고기를 사용하는 일본의 스키야키에 비해 도미, 숭어, 잉어 등 어류가 주재료가 되며, 그로 인해 도미찜, 숭어찜 등으로만 불리기도 한다는 점이 각각 별개의 음식이라는 근거로 작용한다.
Ⅳ. 수원시 주민자치재정 확보의 시사점
제1절 수원갈비의 역사
1. 수원 갈비문화 배경
우시장의 형성 배경을 논할 때는 개혁과 효의 상징인 정조(正祖, 1776∼1800)를 빼 놓을 수 없다. 수원에 화성(華城)을 축조한 정조는 수원이 자립 도시로 기능할 수 있도록 둔전(屯田·군량을 충당하기 위해 요지에 설치한 땅)을 경영했다.
『화성성역의궤』에는 도시와 성곽(城郭) 및 행궁(行宮) 축조와 공사에 관련된 공식 문서와 참여 인원, 소요 비용 및 물품, 건축 설계 및 이용 도구, 예산 및 결산에 관한 보고, 그리고 공사에 참여한 1,800여 명에 이른 기술자의 명단까지 직종별로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나라의 공식적인 기록에 천민(賤民)인 석공이나 목수, 미장이나 기와장이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또한 임금을 하루 반나절까지 세밀하게 계산하여 지급했다는 사실이다.
농민들에게 종자와 소를 나눠주고, 농사를 짓게끔 했다. 수확기가 되면 수확의 절반을 거둬들이고, 소는 3년에 한 마리씩 갚게 했다. 이후 소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거래를 할 마땅한 장소가 필요해지자 성 안팎에 우시장이 하나둘 생겼다. 장이 열리는 4·9일 닷새 간격으로 우시장에는 소 장수와 농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지리적인 요건도 수원 우시장 발전에 한몫했다. 수원 우시장은 19세기 중반 이후 충청도 지역의 소가 값이 좋은 서울로 올라온데 힘입어 크게 성장했다. 조선 시대에는 종묘사직이 있는 한양 도성 내에서의 도축이 엄격히 금지됐다. 이에 따라 우시장도 서지 않았다. 이 때문에 한양 남쪽에서 가장 큰 수원 우시장에서 소를 팔면 더 좋은 값을 받았다. 안성장(2·7일), 오산장(3·8일) 등 주변 시장 소들도 수원에서 유통됐다.
정조시대 화성축성에는 모군(募軍) 등 잡부들의 인건비가 70% 이상으로 지출된다. 약 9,779냥이다(김균태, 2009 : 4-5). 마소 운임에도 1,169냥이 집행된다. 모군들은 가족들을 데리고 수원지역으로 들어와 천막을 짓고 눌러 앉았다. 공사가 끝나자 다른 일을 달라고도 했다(이달호, 2007 : 148).
따라서 소 장수들은 수원 우시장에서 좋은 값으로 어미 소를 팔고, 다시 송아지를 사서 1년 키워 수원에서 다시 파는 식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했다는 게 한 관장의 설명이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열리면서 수원 우시장의 규모는 더욱 커졌다.
일제강점기 수원 우시장에서는 연간 2만 두의 소가 거래됐다. 수원 우시장보다 거래량이 많은 우시장은 연간 2만5천두 정도의 소가 거래되는 함경북도 명천군 명주장과 길주군 길주장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수원 우시장은 전국 3대 우시장의 지위를 단 한번도 놓치지 않았다.
정조시대 화성건립을 계기로 소시장, 불고기 문화 활성화 된다. 정조의 둔전, 국영농장 대유둔 정책으로 농민과 노동자 유입된다. 수원유수부에서 잔치에 소고기 식용 시책으로 소고기소비 활성화, 갈비문화로 정착된다. 현재의 불고기와 갈비가 일상화 된 배경과 원인의 하나로는 유교식 제사상에 제수용품으로 소용되어졌기 때문이다. 그것이 외식으로 발전한 것이다. 안동의 헛 제사밥을 예로 들 수 있겠다.
수원 갈비의 유래는 조선 시대 후기 수원 우시장의 형성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게 통설이다. 우시장을 곁에 두고 있어 음식 재료로 쓸 소갈비를 구하기가 쉽다 보니 자연스레 `수원 갈비'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수원 갈비가 현재의 명성을 얻기까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원조 수원 갈빗집으로 불리는 '화춘옥'(華春屋)이다. 화춘옥은 이귀성(1900∼1964)씨가 1945년 12월 팔달문 밖 장터인 지금의 영동시장 싸전거리에 '미전옥'(米廛屋)을 세운 것이 시초이다. 이씨는 2년 뒤 제자거리 2층 목조 건물로 옮겨 화춘옥으로 이름을 바꾸고 본격적으로 갈비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씨의 손자인 광문(61)씨 등이 화춘옥을 비롯한 수원 갈비의 역사에 대해 구술한 '수원 갈비를 만든 사람들'을 보면, 화춘의 화자는 화성 화서문(華西門)의 화(華)자를, 춘 자는 이씨의 형이자 광문씨의 큰할아버지인 이춘명씨의 춘(春)자를 딴 데에서 유래됐다. 춘명씨는 일제강점기 화춘제과를 운영하다 문을 닫았는데, 이씨가 형의 제과점 이름을 따서 갈빗집을 개업한 것이다. `화춘'이라는 명칭을 계속 사용함으로써 가업을 잇는다는 의미를 담았다.
광문씨는 "해방 이후 밀가루나 설탕 공급이 안 됐다고 한다"라며 "과자 같은 것을 많이 하셨다고 하는데, 설탕이랑 밀가루가 없으면 (과자를) 못 만드니까 그걸 접으면서 (식당으로) 바꾸신 것"이라고 갈빗집 창업 배경을 전했다.
화춘옥은 초기 설렁탕, 육개장, 해장국 등을 주 메뉴로 하면서 갈비를 선보였는데, 나중에 참기름, 소금, 설탕 등을 넣어 만든 양념을 왕갈비에 발라 구워 먹는 양념갈비를 팔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광문씨는 "(다양한 음식을 파는) 식당인데 사람들이 갈비를 찾으니까 갈빗집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화춘옥 2대 주인인 이씨의 아들 영근씨는 갈비의 양념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켰다. 이로써 1970년대 화춘옥의 명성은 더욱 높아져 항상 문전성시를 이뤘다. 박정희 전 대통령도 경기도에 들르면 화춘옥의 수원 갈비를 먹었다. 이 소문이 또 퍼지면서 화춘옥은 유명세를 치렀다.
오늘날 수원갈비의 기원을 찾으면 화춘옥이 나오고 그것은 궁중요리에 연결된다. 결국 궁중요리와 수원 유수부의 행사 등에서 사용되어진 쇠고기 요리가 수원화성 건설과 관련되어 동원되어진 연간 3천여 명 이상이 모군(募軍)과 막일꾼 등에게 국밥과 함께 제공되면서 확산되어진 것이다(윤종군, 2013).
역사적 측면에서 보아도 한국인들은 고기를 구워 먹는 걸 좋아한다. 지금도 친구들을 만나면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은 기본이다. 기마민족의 후예라 그런지 한국인들에게 숯불구이를 선호하는 유전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불에 피워 즉석 고기구이를 즐기는 우리의 습성은 먹고 살기 좋아진 현대에 생겨난 풍속이 아니라 먼 옛날부터 이어져 내려온 전통이었다.
순조 때 서유구가 쓴 『임원경제지』에는 예전에는 첨자(簽子) 즉 대나무 꼬챙이에 고기를 꿰어서 구웠는데, 지금은 철망을 쓰니까 꼬챙이가 필요 없어 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통해 순조 시기에 오늘날처럼 고기를 구울 때 석쇠를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옛 문헌에서 석쇠가 주로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은 조선 중종과 선조 무렵이다. 조선 중기 이후 꼬치구이 대신 석쇠에 고기를 굽는 현재의 광양 불고기와 같은 조리법이 나온 것으로 보인다. 『열하일기』의 저자 박지원은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기며 풍류를 읊었다. 눈 내리는 날에 김술부 공과 함께 화로를 마주하고 고기를 구워먹으며 난로회를 열었는데 방안이 연기로 후끈거리고 파, 마늘, 고기 굽는 냄새가 온 몸에 배었다. 공이 북쪽 창문으로 가서 부채를 부치면서 맑고 시원한 곳이 있으니 신선이 사는 곳이 멀지 않다고 말했다(난로회 :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10월이 되면 소고기를 기름간장, 달걀, 파, 마늘, 후추가루 등으로 양념해 화로에 구워먹는 풍습이라 한다.)
정리 한다면, 맥적에서 비롯된 우리의 고기 굽는 방법이 신라, 고려 때는 설야멱이라는 숯불 꼬치구이를 거쳐 현대적인 철판구이, 석쇠구이, 돌판구이 등으로 발전했고, 다른 한편으로 새로운 조리기구가 만들어지며 국물과 함께 먹는 전골과 불고기, 갈비문화로 발전한 것이다.
2. 수원 갈비의 주요특징
수원갈비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크기와 양념을 꼽을 수 있다. 수원갈비는 종종 ‘수원왕갈비’라 불리는데 수원갈비에 ‘왕’자가 붙는 것은 과거 정조대왕부터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라의 지도자가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커다란 갈빗대 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초창기 수원 왕갈비는 그 크기만 15cm가 넘었다. 타 지역보다 2~3배 이상 큰 갈빗대 크기 때문에 수원갈비가 왕갈비라 불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이 12cm 내외로 작아졌지만 여전히 다른 갈비보다 크기 면에서나 양적으로 우월해 푸짐하다.
수원갈비는 소금간을 기본으로 한다. 여기에 설탕, 마늘, 깨소금, 참기름, 후춧가루 등을 더하는데 간장과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고기 맛이 담백하고 육질이 부드럽다. 또한 쇠고기의 신선한 색을 그대로 유지해 맛깔스러운 것이 특징이다. 양념 후 숙성시킬 필요없이 즉석에서 구워낼 수 있어 조리가 간편하다.
수원갈비 특징은 소금 간은 고려, 元 제국 문화와 상통하는 문화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다. 간장을 사용하지 않고 소금과 설탕, 후춧가루, 참깨, 참기름, 마늘 등으로 양념하여 느끼하지 않고 색의 변화가 없으며 담백한 맛을 유지한다. 크기는 10~17cm 내외로 소금양념과 커다란 갈비 크기가 특징이다(이재규, 2002).
수원갈비 특징은 소금 간은 高麗, 元帝國 문화와 상통하는 문화와 맥을 같이한다는 점이다(이종수, 2016ab). 간장을 사용하지 않고 소금과 설탕, 후춧가루, 참깨, 참기름, 마늘 등으로 양념하여 느끼하지 않고 색의 변화가 없으며 담백한 맛을 유지한다. 크기는 10∼17cm 내외로 소금양념과 커다란 갈비 크기가 특징이다(이재규, 2002). 표준화된 조리법을 정립해 언제나 같은 맛을 낼 수 있도록 시스템화했다. 전통방식을 잇는 동시에 이를 현대화하여 수원갈비의 정통성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수원 왕갈비와 평양갈비 문화가 현대적으로도 계승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우리 고유의 맥적문화와 전국적으로 수위에 있었던 우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이종수, 2014.4 ; 2015.12).
제2절 주민자치 재정 측면
1. 주민자치재정 확보 방안
첫째, 주민자치와 재정적 측면에서는 향약의 공동재산 형성노력으로 향약기금 사례 등을 참조할 수 있다. 이를 토대로 서원의 청소년 교육과 향교의 노약자 지원을 이루어냈다는 점에 착안하여 지역도서관이나 노인복지관 등에 대한 지원프로그램을 개발한다(이종수, 2016.7).
현대적으로는 특히 광역 및 기초자치단체에 지원조직 설치 및 전담공무원 배치와 주민자치회가 자치단체로부터 위탁, 위임사무나 주민자치사무 발굴 및 운영을 통해 얻은 수수료, 사용료, 수입금 등 자체 재원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동답(洞畓) 매입 등을 들 수 겠다. 재정은 유향소, 향교, 서원 지원비 등과 공동 재산 형성을 통하여 해결하였으며, 교육자치 재정은 공공재정 및 수익사업 등을 통하여 접근할 수 있다.
둘째, (재)수원갈비문화원과 수원갈비의 민간외교 사절로는 수원갈비문화원을 꼽을 수 있다. 수원갈비문화원은 15년 전 수원갈비를 홍보하기 위해서 요리사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는 취지로 전격 결성, 70여명의 조리사와 관련 직종 종사자 및 일반인까지 확대되어 현재 1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수원갈비문화원의 김종만 회장은 “수원갈비 홍보를 위해 시식회와 무료 요리 강좌 등을 열고 있다”고 말하며 “수원갈비 전통방식 그대로를 재현, 우수한 수원갈비 맛 뿐 아니라 문화를 널리 알려 세계적인 음식으로 육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의지를 밝혔다.
셋째,(재)수원갈비박물관 신설 등 제언 측면이다. 김종만 대표는 전통방식 그대로 만든 수원갈비를 좀 더 많은 이들에게 선보이기 위해 수원갈비스토리를 오픈했다. 김 대표는 “수원갈비는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먹을거리로 이를 시대와 문화에 맞게 발전시켜 후대에 물려줘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이다”라고 말하며 “수원갈비의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 강조했다.
넷째, 하드웨어 개설을 통한 수원왕갈비 문화의 독창성 스토리텔링 마케팅 수단으로 대학생과 실버를 활용 ‘수원왕갈비문화 스토리텔러’를 양성, 일자리 창출을 도모한다. 우시장 왕갈비와 ‘華春屋’ 대두 등을 스토리텔링하고, 수원 왕갈비문화 체류형 프로그램을 개발한다. 수원 왕갈비문화 체류형 프로그램 개발(최소 1박 2일 이상), 갈비문화 명소 체험 스토리텔링 체험 코스화하거나 수원왕갈비 문화의 독창성 스토리텔링 마케팅 대안을 모색한다.
끝으로, 수원학연구에 대한 기대효과 측면이다. 수원 왕갈비문화 체류형 소프트 프로그램 개발(최소 1박 2일 이상), 갈비문화 명소 체험 스토리텔링 체험 코스화, 수원화성 성곽탐사, 행궁 무예 24기 공연관람, 수원갈비 강좌, 다도 강좌로 이뤄진 수원 화성 1박 2일 관광코스를 개발해 세계문화유산을 경험할 수 있는 기회와 이야기 거리, 지인 권유와 재방문 유인책을 제공한다.
2. 갈비문화의 근대적 계승
부여, 고구려의 맥적에서 비롯된 갈비는 고려 때는 설야멱이라는 숯불 꼬치구이, 조선시대 너비아니로 변화하면서 발전했고, 근래 새로운 조리기구가 만들어지며 국물과 함께 먹는 현대적인 전골과 불고기, 갈비문화가 됐다.
2016년 현재 해외서 가장 인기 있는 한국문화 콘텐츠는 한식과 K-pop으로 1위는 한식(46.3%), K-pop(39.0%), K-fashion・Beauty(35.8%) 순으로 한식은 전통성과 역사성, 건강성 측면에서 문화 콘텐츠가 대단히 풍부하다. 예컨대 한식은 데치고, 삶고, 끓이고, 볶고, 무치고, 지지고, 부치고, 조리고, 찌는 등 수많은 조리법이 있어 다양성이 높은 음식이다. 그 내용들은 음식의 역사, 전통, 건강, 장수, 영양 등의 효과를 불어 넣는 일이다.
수원갈비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크기와 양념을 꼽을 수 있다. 수원갈비는 종종 ‘수원왕갈비’라 불리는데 수원갈비에 ‘왕’자가 붙는 것은 과거 정조 대왕부터 박정희 대통령까지 나라의 지도자가 즐겨 먹었기 때문이라는 설과 커다란 갈빗대 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초창기 수원 왕갈비는 그 크기만 15cm가 넘었다. 타 지역보다 2∼3배 이상 큰 갈빗대 크기 때문에 수원갈비가 왕갈비라 불리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대부분이 12cm 내외로 작아졌지만 여전히 다른 갈비보다 크기 면에서나 양적으로 우월해 푸짐하다. 양념 후 숙성시킬 필요 없이 즉석에서 구워낼 수 있어 조리가 간편하다.
수원 역사 연구가들은 수원 갈비가 우리나라 외식 문화에 끼친 영향이 지대하다고 설명한다. "수원 갈비는 우리 식탁에 서브 메뉴로 올리던 갈비(소고기)를 메인 메뉴로 격상시켰다. 상차림 후 밥이 아닌 고기를 먼저 먹고 냉면 등을 식사로 하는 방식의 등장은 우리 외식 문화를 완전히 바꿔 놓았다"며 "우리가 과거 수육으로 해먹던 돼지고기도 구워 먹는, 예컨대 삼겹살의 발견 등에도 영향을 끼쳤다"라고 평가했다. "수원의 자랑인 수원 갈비의 전통을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는 정통 수원 갈비를 맛보고, 문화·예술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조성할 필요가 있다"라고 의견을 제시했다(연합뉴스, 2018.5.19.).
3. 수원왕갈비 스토리텔링
수원왕갈비 문화의 독창성 스토리텔링 마케팅 대안으로 소프트웨어측면의 체험 프로그램과 하드웨어 측면의 제도 형성측면으로 접근하여 일자리 확충과 지방재정을 확보하는 데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다.
첫째, 수원 왕 갈비문화 스토리텔링 체험코스와 프로그램 신설측면이다. 갈비로 유명한 경기권(포천), 전주권, 부산권(해운대)과 연계한다. 소갈비 소금 간 스토리텔링, 갈비 조리사(전수자) 계보로서의 구영식, 임한영, 김경일 사례(이재규, 2003b : 180) 등을 홍보한다. 동시에 소금 왕갈비 문화의 보존, 확산과 갈비에 걸맞는 수원 전통주 개발도 요청된다. 이런 활동의 주체는 해당지역 주민자치회가 주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둘째, 고조선 단군시대의 달래(마늘)와 쑥문화, 북방계 고구려의 맥적문화의 독자성을 고려의 설야멱과 조선시대의 너비아니 및 현대의 수원 왕갈비 문화와 연계하여 수원갈비문화의 원형을 확인할 수 있다. 북방계 갈비문화 특성이 소금 간이다.
셋째, 특색있는 수원의 관광자원이다. 수원시가 ‘2016 수원화성 방문의 해’를 맞아 전통과 역사, 특색있는 수원만의 관광자원을 적극 알리고, 화성열차·헬륨기구·트롤리버스 등 수원 관광인프라를 확대하는 등 ‘수원 관광의 세계화’에 나서고자 한다(투어코리아, 2016.01.22.). 수원시는 21일 관광전문기자 및 인바운드 여행사를 대상으로 ‘수원시 팸투어 및 관광 설명회’를 갖고, 관광 인프라 확대 등 ‘수원 방문의 해’의 주요 사업을 적극 알리고 있다.
수원에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1997년)된 ‘수원화성’과 사적 제478호인 ‘화성행궁’, ‘박물관’(수원박물관, 광교박물관, 수원화성박물관), 세계유일의 변기모양박물관인 ‘해우재’ 등 역사 와 전통, 특색있는 관광지들이 다양하다. 여기에 경기도가 중국 광둥성이 ‘우호 교류 발전에 관한 실행 협약’에 의해 상대 도시의 정원을 짓기로 함에 따라 조성된 ‘월화원’도 또다른 관광명소로 자리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원천유원지를 복원해 만든 ‘광교호수공원’, 삼성전자의 역사와 최신 전자제품 및 우수한 타사의 제품도 함께 전시한 ‘삼성이노베이션뮤지엄’, 전통음식 체험과 시식을 할 수 있으며 ‘전통식생활 및 예절체험’, K리그와 프로야구 KT의 홈구장인 ‘수원종합운동장’, KBS경인방송센터 등도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높다(투어코리아, 2016.01.22).
화성열차는 서장대가 있는 팔달산에서 화서문-장안공원-장안문-화홍문-국궁장이 있는 연무대까지 3.2km를 1일 12회 왕복 운행하고 있다. 군사들이 무예를 연마하고 훈련하는 연무대에서 국궁 활쏘기를 실제로 체험하는 ‘국궁체험’도 인기 만점이다.
Ⅴ. 나가는 글
이 글은 우리나라 식문화 특성이라 할 수 있는 불고기와 갈비문화의 연원과 확산분석이라는 점에서 기존의 선행연구(필자 포함)들과 차별성이 있다. 주요 내용은 고대의 맥적과 갈비문화가 고려시대는 몽골 영향으로 쇠고기 문화가 이입되어 확산되고, 조선시대는 개성과 한양의 설야멱, 너비아니와 서울의 설렁탕 문화와 수원유수부의 왕갈비문화가 꽃을 피웠다는 점이다.
화성유수부는 정조의 성리학적 민본행정에 따른 백성중심사상이 실학으로 구현되고, 신도시개발이라는 대규모 국책사업시행에 따라 시전과 상업구조의 변화를 유도하여 백성의 삶의 질을 제고하고, 수원의 음식문화를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갈비문화의 토대로서의 우시장 형성과 관련하여 정조시대 화성건립을 계기로 소시장, 불고기 문화가 활성화 한다. 정조의 둔전, 국영농장 대유둔 정책으로 농민과 노동자들이 유입되고, 화성유수부에서 잔치에 소고기 식용 시책으로 소고기소비 활성화, 갈비문화로 정착된다.
수원 왕갈비와 평양갈비 문화가 현대적으로도 계승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 배경에는 우리 고유의 맥적문화와 전국적인 우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불고기와 갈비는 전통적인 제례나 자연지리 조건 등에 따라 음식 정체성이 정립되는 한편 국제화(國際化)의 교류 영향을 받아 강한 혼종성문화로 정착됐다는 점이다. 오랜 세월 동안의 상호 교류 속에 한국적 음식문화로 변동되어 토착화 되었다는 점이다.
결론적으로 조선후기 수원향약과 신도시집행 결과를 토대로 수원지역 재정확충방안 사례와 그 결과로서의 수원왕갈비문화와 재정효과를 현대적 주민자치 활용방안을 제안하였다. 민본사상 실천 제왕으로서의 정조의 신도시개발 정책과 갈비문화를 접맥시키는 한편 백성과 노동자들의 갈비와 갈비탕, 국밥 등 음식문화 확산 이유도 조명해 보았다. 현대적 활용방안과 대응 과제로로는 韓流와 ‘수원갈비 文化’를 연계하여 마케팅하는 전략이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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